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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로드 간즈에서 14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습니다

[인도]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마을

등록 2023.04.21 08:00수정 2023.04.2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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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에서 탄 버스는 한참을 달려 산길에 올라섰습니다. 멀리 설산을 보면서도 몇 시간을 더 달려야 다람살라에 도착합니다. 거기서도 택시를 타고 20여 분을 올라가면 있는 작은 산간 마을. 여기가 바로 맥그로드 간즈입니다.

맥그로드 간즈라는 도시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여기는 14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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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로드 간즈 ⓒ Widerstand


산간에 위치한 마을답게, 맥그로드 간즈는 원래 역사의 중심에 설 일은 잘 없었던 땅입니다. 한동안 영국의 구르카 용병이 주둔했던 땅이고, 유럽인들의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다 1905년 대지진으로 4만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곳이기도 했죠.


전쟁과 지진으로 황폐화된 땅. 복구될 여지조차 없었던 마을이었습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오히려 그래서 이곳을 티베트 망명 정부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이 작은 마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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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로드 간즈에서 보이는 풍경 ⓒ Widerstand


모두들 아시다시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가진 스승입니다. 티베트 불교의 특성상 당연히 환생을 하는 환생불이죠.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것을 '린포체'라고 부릅니다. 죽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으로 환생하는 능력을 가진 스님들을 말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 자체로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달라이 라마 제도는 16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북방 초원 지대에서 성장한 '알탄 칸'이라는 지도자가 티베트 불교와 접촉합니다. 알탄 칸에게는 몽골 초원을 규합할 정치적 정당성이 필요했습니다. 티베트 불교에게는 분열된 티베트를 규합할 종교적 영향력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1578년, 티베트 불교 종파의 수장이었던 '소남 갸초'가 알탄 칸과 만났습니다. 소남 갸초는 알탄 칸을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고 공인해 주었죠. 대신 알탄 칸은 소남 갸초에게 '사해(四海)의 스승'이라는 의미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줍니다.

달라이 라마 제도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몽골과 일종의 동맹을 맺은 역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지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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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망명정부의 네충 사원 ⓒ Widerstand


청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는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청나라는 명목상으로 티베트를 지배했지만, 티베트의 자치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했습니다. 한동안 청 황제가 달라이 라마 선출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그 본질적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 침탈의 시기에도, 티베트는 청나라와는 별개의 주체였습니다. 이미 영국의 침입 등에 맞서며 13대 달라이 라마는 근대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중국 각 지역에 군벌이 들어선 상황에서 티베트는 자치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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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상 ⓒ Widerstand


13대 달라이 라마는 1933년 사망합니다. 그리고 14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죠. 그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입니다. 14대 달라이 라마가 성장한 뒤는, 이미 국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이어진 뒤였습니다. 1950년부터 공산당이 티베트 진격을 시작했죠.


달라이 라마는 1951년 중국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티베트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인정하되, 티베트의 자치권과 달라이 라마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자치정부의 주석으로 선임됩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에 대한 간섭을 점차 강화합니다. 특히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를 처형하거나, 강제로 환속시키는 반종교 정책이 이어집니다. 결국 1959년에는 대규모의 티베트인 봉기가 발생합니다.

중국은 티베트인의 봉기를 강력히 탄압했습니다. 티베트인 8만명 이상이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는 학살극이 연출됐습니다. 티베트 불교 사원이 파괴되고, 사원에는 오성홍기가 게양되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본인에 대한 위협도 거세집니다. 결국 달라이 라마는 티베이트인을 이끌고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인도로의 정치적 망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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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망명정부 ⓒ Widerstand


곧 인도 정부의 협조로 티베트 망명정부는 맥그로드 간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 티베트 문제를 알리려는 노력을 이어갔고, 티베트 불교뿐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비폭력 투쟁노선 등으로 198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어쩌면 그가 겪었던 역사의 격랑 때문일까요. 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이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개혁을 이어갔습니다. 티베트의 헌법을 기초했고, 망명한 티베트인의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를 구성했죠. 2011년부터는 정부 수반의 자리도 직선제로 선출되도록 했습니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인 지도자일 뿐,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치적 지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와 과학이 충돌한다면 과학을 선택할 것이라 말했죠. 스스로 불교도이지만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뜻은 수미산과 같은 우주론이 아니라, 사성제를 비롯한 철학적 가르침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과학을 받아들이며 종교를 발전시키는 진취적 종교인의 모습이, 그가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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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14대 달라이 라마 ⓒ Widerstand


맥그로드 간즈에 도착한 다음날, 저도 14대 달라이 라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가 있었거든요. 여러 신도들이 모여 법회를 치렀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외부 일정은 아주 드문 편은 아니라서, 일정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침 제가 계획한 날에 행사가 있어, 저는 딱히 일정을 수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먼 발치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달라이 라마를 만났습니다. 행사가 끝날 때에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서 만날 수 있었고요. 행사를 주관하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달라이 라마를, 모든 사람이 숨죽여 바라봤습니다.

90세에 가까워진 달라이 라마는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면서도,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을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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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달라이 라마. 행사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유튜브 영상 캡쳐 ⓒ Dalai Lama Archive

 
14대 달라이 라마는 여러 차례 자신은 사후 환생하지 않을 것이라 밝힌 바 있습니다. 중국령 티베트가 아니라 인도에서 환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밝혔지만, 그조차 티베트인 다수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습니다. 달라이 라마 제도 자체가 민주적인 정치제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14대 달라이 라마의 판단입니다.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달라이 라마 제도를 이용하려 했죠. 모든 불교 승려의 환생은 정부의 권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사례도 있습니다. 판첸 라마의 사례죠.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에 이어 티베트 불교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진 지도자입니다. 중국 당국은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알려진 6세 소년을 납치했고, 현재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진짜 판첸 라마를 찾았다며 새로운 판첸 라마의 즉위를 주장하기까지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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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첸 라마의 납치를 알리는 안내판 ⓒ Widerstand


이런 상황에서, 다시 환생하지 않고 열반에 들겠다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판단은 합리적입니다. 사실 달라이 라마를 선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판첸 라마가 실종된 상황에서, 전통적인 의미로도 달라이 라마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환생도 세습도 현대적인 정부 형태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14대 달라이 라마가 떠나고 이제 누구도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산길을 올라 맥그로드 간즈에 올 수 있을까요. 그가 없다면 이제 자유롭고 자주적인 티베트를 국제사회에 말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누가 그 구심점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정말로, 14대 달라이 라마가 없어도 티베트의 자유에 지금처럼 관심을 가져 줄까요? 제겐 우려와 걱정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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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사원의 법회 ⓒ Widerstand


물론 티베트의 스님들은 수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종교는 한 명의 사람이나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스님들은 여전히 진리를 향한 끝없는 갈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티베트 독립운동도 마찬가지겠죠. 민주 정치 역시 한 명의 영웅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어버린 자리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없다면 우리를 묶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유와 정의, 진리, 신념, 종교. 위대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이, 우리를 한데 묶어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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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사원의 티베트 국기 ⓒ Widerstand


낮은 음으로 경전을 읽는 스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달라이 라마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서여야 합니다. 자유와 정의, 평등과 진리를 위해 정진해야 합니다.

세습도 환생도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유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 낸 진보의 결과물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에, 인간이란 또 얼마나 나약합니까.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티베트 #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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