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소심한 복수, 밤 11시에 제자에게 전화해 봤습니다

길게는 40년 가까이, 짧게는 30년 인연... 4년 만에 만난 반가운 제자들

등록 2023.05.15 09:04수정 2023.05.15 09:0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대천 해수욕장 ⓒ 최승우

 
제자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매년 6월과 11월 1박 2일의 정기적인 만남이 코로나19로 연기된 지 4년 만이다. 두 달을 앞당긴 4월 말 모임은 전적으로 내 의견을 따른 제자들 덕분이다.


고등학교 시절 매주 토요일 상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길게는 40년 가까이, 짧게는 30년이 다 돼가고 있다. 만남마다 평균적으로 약 20명이 참여하나, 4년 만의 모임치고는 다소 적은 13명이 동참했으며 전부 남자 제자였다.

해마다 서울과 광주의 중간 지점인 충남에서 주로 모이는데 이번 모임은 대천에서 갖기로 했다. 나이를 먹으면 뻔뻔해지는지 광주 사는 제자에게 나를 픽업하라고 했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라는 평소 생각이 만만한 제자 앞에서는 주저 앉는다. 일신의 편안함에 제자의 불편함은 가중되나 제자는 그대로 따른다. 그 대신에 "선생님 제가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라는 잔소리는 감수해야 한다.

오후 6시, 모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몇몇이 당구장에 갔다. 두 명씩 편을 갈라 당구를 치는데 실력이 엉망이다. 당구 구력이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당구대 상태도 50년에 육박하는 듯 당구공의 속도가 줄면 직선 운동이 곡선 운동으로 변하는 마법을 연출한다.

식사 장소에 도착하니 흐릿한 바깥 풍경에 반하여 선명한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해 반가움이 더한다. 오랜만의 만남은 긴 술자리로 이어졌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궁금함과 아쉬움이 커진다.

모임의 회장을 맡은 제자는 적은 참여 인원에 실망감을 표현하며 회원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서울 방문을 제안한다.


"선생님이 서울 한 번 올라오셔야겠어요. 그래야 회원들이 많이 참석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한 번 올라갈게."


오십이 넘은 제자가 모임 참석 인원을 늘리려는 방법으로 서울 방문을 청한다.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표현한 것 같아 고마움과 책임감을 느낀다. 나는 여전히 행복한 채무자인 것이 분명하다.
 
a

제자와 함께 한 식당 ⓒ 최승우

 
술자리는 이야기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제자와의 시간은 벌거숭이 맨 몸같이 감출 것이 없다. 결혼을 앞둔 딸아이와 사위 이야기, 상사와의 불편함으로 보직 전보를 받은 일, 이기적인 직장 후배 이야기, 깊은 가정사, 치명적인 질병에 대처하는 태도, 사업체의 확장 등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망라한 이야기로 어둠은 짙어졌다.

술에 취할수록 이야기는 깊어지고 이야기에 취할수록 술도 더해갔다. 물속에 불은 품은 술은 이성적 인간을 감정의 폭풍으로 이끌고 우리는 기꺼이 동참한다.

술만 먹으면 늦은 밤에도 전화하는 제자가 있다. 그 녀석은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기 전에 감정의 동물임을 강력하게 증명하고 있다. 덕분에 내 단잠이 달아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 먹은 김에 밤 11시경 소심한 복수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과 자기 잘못을 너무 잘 알기에 피한 것 같다. 이 녀석은 분명히 나보다 한 수 위다.

호주에 사는 제자를 모두가 궁금해 하기에 연락했다. 술만 먹으면 늦은 밤에도 전화하는 제자의 막무가내를 그대로 따라 했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는 기꺼이 응대했고 화상대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진희야! 이게 얼마 만이냐! 나 석경이야!"
"누나! 나 누군지 알겠어요? 내가 누나 학교 다닐 때 좋아했는데."


30년이 지난 시간의 흐름을 역류하듯 선·후배의 대화가 이어지나 오랜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서먹함은 숨길 수 없다. 서로 모르는 후배들도 잠깐의 인사에 동참한다. 대화가 익을수록 서로의 어색함은 달아나고 예기치 않은 만남의 즐거움으로 한밤의 어두움은 저만치 멀리 있다.

"선생님! 호주에 언제 안 들어오시나요?"
"응! 내후년 2월에 들어갈 것 같아. 막내 졸업식이 있어. 너는 언제 안 들어오냐?"

"올 겨울에 들어갈 것 같아요."
"들어오면 한 번 보게."

"네! 그럴게요."


늦은 밤 무례한 전화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만족감을 주었다. 한밤중에 불청객을 맞이한 제자도 잊힌 오랜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었길 기대해본다.

아침에 가벼운 산책과 함께 조금 늦은 식사를 했다. 제자들은 다음 모임 일정을 정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공교롭게 살집이 있는 제자들이 함께 걸어간다. "저 사람들은 손에 주름이 없어!"라며 한 제자가 농을 친다. 나도 한마디 거든다. "손에 보조개도 네 개씩이나 있어." 모두가 웃는다.

1박 2일의 추억이 또 쌓였다.
#제자 #만남 #대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직을 정년 퇴직한 후 공공 도서관 및 거주지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도서관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백수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