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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한 판사의 탄식 "75년만에... 형언할 수 없는 고초"

[제주 4.3 희생자 재심재판 방청 후기] 생사조차 확인 안 되는 망인들의 사연

등록 2023.06.15 20:39수정 2023.06.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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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3일 오후 2시 30분, 제주지방법원(강건 부장판사)에서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2023재고합15) 수형인 30명에 대한 제32차 재심재판이 진행됐습니다.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은 본 재판에 참석해 무죄선고 받은 제주4.3 희생자 유족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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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직권재심 재판이 열리는 제주지방법원 앞 ⓒ 제주다크투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12월 계엄령이 내려진 시기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열린 군법회의와 1949년 7월 예외적으로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민간인 대상 군법회의가 있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442).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군법회의 명령'*에는 군법회의 명령서와 함께 2530명(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의 군법회의 피고인 명부가 별첨돼 있다. 명령서엔 설치명령, 공판장소, 죄목(죄과, 범죄사실), 심사장관의 조치, 확인장관의 조치 등이 인쇄돼 있다. 별첨 피고인명부는 피고인의 인적 사항과 항변 판정 판결 항목, 언도일자, 복형장소(형무소) 항목 등으로 나눠져서 표로 작성돼 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448).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돼 재소자 생활을 했다. 이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형무소별로 불순분자 처리 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 처리됐다. 일부는 옥문이 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행방불명되면서 현재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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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차 직권재심 재판 공안안내 (1), 30명의 수형인 피해자의 이름과 죄명을 나타내고 있다. ⓒ 제주다크투어

 
제32차 직권재심 재판 피고인 중 망 이동신, 김병길, 김창종, 이팽로, 박홍기, 강재옥, 강병수, 이태순, 양군선 이하 9명은 1948년 12월께, 일률적으로 구 형법 제77조 위반 내란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날 재심재판에서 밝혀졌듯 검찰은 이들이 내란죄라는 공소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망 강재옥은 28세의 운전수였다. 그는 무장대로 오인 받아 토벌대에 연행된 후 내란죄 위반으로 15년형을 받아 목포형무소에 있다가 대구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러다가 행방불명됐다. 이날 그의 아들 강OO은 재판정에 참석해 "어머니는 제가 5세 때 재혼해갔고, 하나도 모르겠다. 할 말이 없다"라며 75년의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느끼게 했다.

망 강병수는 애월리 출신으로 제주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17세의 청소년이었다. 1948년 7월 토벌대가 급습해 연행돼다가 내란죄 위반으로 15년형을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동생 강OO은 판사에게 "기억나는 게 없다. 제가 형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면서 형에 대한 기억을 전했다.

망 이태순은 부모님 밑에서 농사를 짓다가 어느 날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가족들은 소식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내란죄 위반으로 5년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외조카 고OO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들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는 소감을 남겼다.

제32차 직권재심 재판 피고인 중 망 양태운, 송창립, 고순학, 김상국, 양상순, 홍순병, 고두정, 정영익, 고성봉, 고형관, 김시옥, 양군봉, 김홍영, 한치욱, 김영희, 김이오, 이대봉, 문성영, 이윤옥, 신두옥, 한인수 이하 21명은 1949년 7월경 '국방경비법' 제32, 33조 위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및 간첩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공소사실을 증명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날 검찰의 의견이었다.


망 송창립은 오라리 출신의 19세 청년으로 1949년 밭으로 나갔다가 연행돼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재판에 참석한 조카 송OO은 "사진 속에서만 작은 아버지를 봤다. 할머니가 2000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피고인이 어딘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한인 것 같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현대사회에 일어났다는 것이 아쉽다. 제주도, 한라산을 다 태워서라도 공산 폭도를 잡겠다고 해서 희생된 것이 제주도민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망 고순학은 대정면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구형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형돼 있다가 부산형무소를 거쳐 마산형무소로 이감, 이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고OO은 "오늘 재판에서 피고인이 마산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전에 아버지에게 대전이라고 들었었다"라며 "오늘 망인이 무죄선고를 받는다면, 마음 한쪽의 무거운 것을 내려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망 김상국은 오라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김OO은 " 큰아버지가 너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오늘 이렇게 재심을 통해서 무죄판결 받아서 지금이라도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망 홍순병은 오라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동생 홍OO은 재판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떨떨하다. 사실상 형님은 아버지와 같이 농사를 짓다가 공권력에 의해서 죽어가서, 아마 대전형무소에 계셨던 것 같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는 형이 무슨 연유에 의해서 끌려가서 감옥살이를 했는지 상당히 억울하게 생각하셨다. 한 10년 전 까지도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았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제사도 안지내고, 생일날 제상을 마련해왔다.

저는 동생이지만, 연좌제라는 혹독하는 법이 있어서 사회에 진출하려니 어려웠다. 뭔가 노력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연좌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억울했다. 만약 무죄판결이 내려진다면, 영령이 가시는 데 상당한 위로가 될 것이다. 동생으로서 어느 정도 형님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내려주신다면 저 또한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망 정영익은 가시리 출신으로 28세에 농사를 짓다가 마을 초토화를 피해 산으로 도피했다가 연행됐다.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손자 정OO은 판사에게 "할아버지가 사망 당시 아버지가 4살, 큰아버지가 7살이었다. 그 나이에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겠는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저희 할머니, 증조부까지 4명이 모두 희생되셨다"라며 "과거의 잘못된 정부의 판단으로 무고한 도민이 희생을 당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증거도 없이 끌려가 생사도 모르는 그런 시간 동안, 우리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가묘를 만들어 제사지내던 것이 너무나 억울한 부분이다. 재판장님의 이번 재심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바라겠다"라고 밝혔다.

망 고형관은 광령리 출신으로 구장직을 맡다가 소개령에 의해 하귀리 살던 중 1949년 1월에 연행됐다고 한다. 그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이 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들 고OO은 재판에 참석해 "말이 잘 안나오는데, 30대 나이에 마을 구장이라는 그 직책이 힘들었겠는가. 그 직책을 맡았다고... 아버지는 죄가 없다고 들었는데, 나는 학교도 못 다녔다"라며 "우리 둘째 자녀는 그래도 대학을 안가고 공군사관학교를 간다고 했는데 합격을 하고도, 신원조회로 잘려버렸다. 그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오늘 재판으로 그 상처가 조금 낫는 것 같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남겼다.

망 김시옥은 와흘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김OO은 마이크를 들며 "아버지가 4형제다. 얼굴도 모르고, 사진도 없다. 망인의 죄명이 뭔지도 여기와서 알았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다. 군인도 아닌데 국방경비법의 적용을 받은 것도..."라며 "연좌제가 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전부 다 억울한 삶을 사셨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명예회복을 할 기회가 와서 반갑다"라고 밝혔다.

망 한치욱은 와산리 출신의 20대 청년으로 토벌대를 피해다니다가 함덕리 주둔지에 자수했다. 그는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받았다. 이후 가족들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다는 편지를 받았으나 이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딸인 한OO는 "우리는 어려서 잘 모르는데,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서 돌아가셨다는데, 아버지 시신이나 찾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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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차 직권재심 재판 공안안내 (2), 30명의 수형인 피해자의 이름과 죄명을 나타내고 있다. ⓒ 제주다크투어

 
이날 강건 판사는 망인이 된 30명의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 판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75년의 긴긴 세월이 흘렀는데, 유족들도 많은 분들이 생을 마치셨다. 재심재판이 조금이라도 빨리 진행됐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만시지탄이 될지 모르나, 형언 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가족들과 만나지 못한 피고인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또한 유족들이 망인은 무죄라고, 기억을 새로이 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직권재심재판 판사가 강건 부장판사로 교체된 이후, 재판의 형식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제주 출신으로 법정에 참석한 피고인의 유족에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소회를 밝혀달라 했다. 또한 방송촬영이 불편하다면 거부할 권한이 있음을 각 유족별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75년 전의 공권력과는 매우 다른 장면이다. 군사재판 수형인 희생자들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형을 받아 전국의 형무소로 흩어져 고통받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003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선명하게 존재했던 '연좌제'의 사슬이 유족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2023년 6월 재심재판 법정에서는 검사, 변호인, 판사까지 모두 피고인의 죄가 없음을 증명했고, 그들의 작은 권리 하나도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이 재판과정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강건 부장판사가 소회에서 밝혔듯이 이번 재심으로 고인이 된 4.3 군사재판 수형인들의 명예회복에 정말 긴긴 세월이 걸렸다. 가까운 가족과 유족마저도 이미 세상을 떠나 법정에 참석한 유족의 대부분은 손자녀, 조카들이다.

강 판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유족들에게 그간 정부(공권력)이 자행하고 숨겨왔던 역사를 하나 하나 들려주며, 기록에 자세히 남기고 있다. 그는 국사재판 수형인들이 75년 전에 빼앗긴 권리를 조금이라도 보상하고 싶은 마음인지, 시간을 들여 과거 군사재판의 경위, 검사 및 변호인의 변론, 이번 재심재판의 경위까지 세세하게 언급하고 설명했다. 적어도 필자에겐 강건 부장판사의 마음이 이렇게 느껴졌다.

무죄판결을 기다리는 유족, 매번 재판을 방청하는 관계자들에게 긴 재판의 과정은 지루할 수 있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재판이 거듭될수록 부장판사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과거 국가의 폭력피해가 진실에 다가가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재심으로 무죄를 기록하고 밝히는 시간이 너무 짧게 끝난다면 그것 또한 희생자와 유족에게는 온당치 않을 수 있다.

앞으로도 남겨진 4.3 재심재판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많은 시민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청해 목격자가 돼주길 바란다. 
#제주지방법원 #직권재심 #군사재판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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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길 - 제주다크투어’는 제주에 위치한 비영리 단체입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여행 속에서 제주 4.3을 알리고 기억을 공유합니다. 제주를 찾는 국내외 사람들과 함께 제주 곳곳의 4.3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록하며 알려나가는 작업을 합니다. 국경을 넘어 아시아 과거사 피해자들과도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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