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조각은 하지만 깎지 않는다'로 유명한 창원 조각가

[창원의 등록문화재 산책] 소답동 김종영 생가

등록 2023.06.21 08:03수정 2023.06.21 09:23
0
원고료로 응원
6월 11일부터 24일까지 창원 한달살이 중입니다. 창원의 근대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 탐방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창원시에서 여행 경비 일부를 지원하는 '창원에서 원 없이 머물다'라는 한달살이 프로그램에 2주 여행 계획으로 신청해 운 좋게 선정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창원의 근대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 탐방을 계획하였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공간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지금의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될 수 있는 미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등록문화재를 만난다는 것은 50년 전의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100년, 200년 후의 미래의 어느 공간을 거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등록문화재 김종영 생가
 
a

김종영 생가 대문 ⓒ 박상준

a

김종영 생가 안채 ⓒ 박상준

      
a

김종영 생가 안채 왼쪽에 있는 사랑채 건물 ⓒ 박상준

   
a

김종영생가의 문간채 ⓒ 박상준

 
창원에서 만난 첫 등록문화재는 김종영 생가였다. 창원 출신의 조각가인 김종영을 기념하는 시설이다. 문화재청이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200호로 지정하였다가 2021년 11월 문화재 지정 번호를 폐지하여 문화재번호 없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현대 조각의 개척자이자 미술교육의 선구자인 우성 김종영 선생(1915~1982)의 생가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있는 한옥 건물이다. 'ㄷ자형'의 안채가 중앙에 자리 잡고 안채의 왼쪽에 'ㅡ'자형 사랑채가 안채 쪽으로 향하여 있다. 대문 옆으로는 문간채가 있다.

이 가옥은 유서 깊은 전통 한옥은 아니다. 전통 한옥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결합한 건축물이다.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이 있고, 미서기(미세기, 방문 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쳐서 여닫는 문으로, 미서기라고도 하는데, 미닫이와는 달리 반만 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 두산백과 출처)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이 특징적이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근대 한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영향도 엿보인다. 별채 사미루는 지붕 위 누각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축물로, 중국의 건축양식이 보이는데 중국인 석수가 참여했다고 한다. 현재의 집은 1940년에 다시 증개축한 것인데 이때의 상량문에 의해 4월에 사랑채를 증축하고 같은 해 8월 초에 문간채를 새로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a

김종영 생가 별채 사미루 ⓒ 박상준

    
본가에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외에도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한다. 별채 사미루는 도로 건너편에 있어 독립된 다른 집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같은 울타리 안의 한 집이었다.


현재는 도로가 있고 주변에 아파트 등 많은 건물들이 있어 옛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사미루까지 한 울타리로 짐작해 보면 가옥 전체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a

김종영 생가 부근 아파트 벽에 김종영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이 붙어 있다 ⓒ 박상준

   
a

김종영 생가 옆의 아파트 벽면에 작가 소개와 작품을 붙여 작가와 작품을 기념하고 있다. ⓒ 박상준

   
a

김종영 생가를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와 높은 건물들 ⓒ 박상준

 
1970년대 이후 경제 발전과 함께 생가가 있던 이곳도 개발되는 과정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섰는데 1994년에 마당 한가운데에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본가의 일부 건물을 철거하고 본가와 사미루·별당의 별채가 분리되었다.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급의 건축물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주위에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식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어 외로운 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삭막한 빌딩 가운데 서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 안온한 분위기를 선물하기도 한다.
 
a

김종영 생가에는 지금 수국꽃이 한창이다 ⓒ 박상준

   
홍난파가 작곡한 가곡 '고향의 봄'은 다 알지만 그 노랫말 중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ㄴ 동네~~'라는 부분이 이 집의 꽃핀 풍경을 묘사한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홍난파가 작곡한 가곡 고향의 봄의 노랫말을 쓴 이원수 동시 작가도 이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이 마을에 살았던 어린 시절에 뛰어놀며 보았던 마을의 가장 큰 집 돌담 너머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과 마을의 정경을 생각하며 이 노랫말을 지었다고 회고하였다.

우성 김종영의 생애와 작품
 
a

1953년 작품 '새'-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으로 꼽힌다. (김종영 미술관 홈페이지 수록 사진) ⓒ 박상준

   
a

김종영 조각 '작품 74-6' (김종영 미술관 홈페이지 수록 사진) ⓒ 박상준

   
a

김종영 조각 '작품 76-17' (김종영 미술관 홈페이지 수록 사진) ⓒ 박상준

   
a

김종영 조각 '작품 80-12' (김종영 미술관 홈페이지 수록 사진) ⓒ 박상준

   
a

김종영 조각 '작품 78-28' <김좀영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2015년 생가 대문 앞에 세운 작가의 작품 ⓒ 박상준

 
우성(又誠) 김종영은 많은 작품을 조각한 조각가로서 우리나라 미술 교육의 선구자이다. 경상남도 창원 출신인 그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김종영은 1941년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해서 그해 12월 8일 이효영과 결혼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지 않으며 고향에서 칩거하였다. 김종영은 작품제작 시 일절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작품을 자신의 분신과 같이 여겼다고 한다. 김종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1세대 교수로서 32년간 제자들을 길러내고 1980년에 정년퇴임한 후 1982년 68세에 돌아가셨다.

김종영은 '조각은 하지만 깎지 않는다'는 이른바 '불각'을 추구하며 재료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살리는 작품 활동을 했다.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이라 할 수 있는 <새>는 1953년 만든 작품이다. 철 조각인 <전설>은 한국 현대 조각사의 이정표라 평가받는다.

김종영은 생전에 조각 300여 점, 드로잉 3000여 점, 서예작품 1000여 점을 남겼다. 대표 작품으로는 <전설>(1958), <전몰학생위령탑>(1958), <3·1운동 기념탑>(1963), <가족>(1965) 등이 있다.
 
김종영이기에 시공을 초월해 완당과 세잔느를 비교해서 인류 보편의 진정한 예술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리는 이의 뜻을 중시한 선비들의 그림 그리는 전통과 서양미술의 추상미술을 동격으로 살펴 작가의 뜻을 중히 여기고,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불각 不刻의 미'라는 이십 세기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예술론을 완성하고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진정한 선각자였다. (김종영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 김종영 생가 마당에서 찍은 360도 사진 ⓒ 박상준

 
#김종영 생가 #김종영 #창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창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의 교육과 문화에 관한 관심이 많다. 앞으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통해 한국 근대문화유산과 교육 관련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