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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소곡주, 계룡 백일주... 대전은 없다? 말이 안 되죠"

[인터뷰] 전통주 '노산춘' 복원해낸 이미리 전승자

등록 2023.06.22 10:51수정 2023.06.2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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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춘 전승자 이미리 주령사 이미리 주령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술이 이대로 사라지게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 ⓒ 김선재

 
대전시 유성구 문지동 전력연구원에는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숨겨진 절경과 이야기가 숨어있다.

연구원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신창 노씨(新昌 盧氏) 집성촌이었다. 그들은 이 땅에 대대손손 500년 넘게 살았지만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오며 고향을 떠나야 했다.


사람들이 떠난 지금 이곳에 선산, 묘 그리고 재실만이 남겨져 있다. 사람들이 떠남과 동시에 그들이 이어오던 전통도 차츰 잊혀 갔다. 지역에 내려온 위인의 이야기, 민속놀이 그리고 전통주도 차츰 명맥이 끊어졌다. 특히 전통주 '노산춘'은 새로운 전승자가 없어, 자칫 잘못 역사 속 기록으로만 남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이가 있었다. 우리 술 스토리텔러 이미리 주령사가 바로 그 주인공. 비록 같은 문중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술이 이대로 사라지게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역사 기록을 추적하며 온갖 고생 끝에 결국 '노산춘' 복원에 성공했다. 문중으로부터는 정식으로 전승자 인증을 받았다. 지난 13일 신창 노씨 재실에서 그를 만나 전통과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산춘'의 시작

이야기는 조선 중기 무관이었던 노세신 장군(1649~1720)으로부터 시작했다. 장군은 압록강을 접하고 있던, 이산진(理山鎭)과 산양회진(山羊會鎭)에서 국경 수비를 맡았다. 이산진과 산양회진은 여진족이 조선으로 들어오던 길목이었다. 지금은 자강도 초산군 지역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군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를 하며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술을 정성스럽게 빚었다. 탈상 때 어머니 제사상에 올릴 요량이었다. 탈상을 끝내면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고 했다.


시묘살이가 끝날 무렵 서울에서 지위가 높은 관리 한 명이 장군을 찾아왔다. 그는 장군에게 지금 익히고 있는 술을 내어달라 요구했다. 노세신 장군은 어머니 제사상에 올릴 귀한 술이니 내어줄 수 없다며 관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노세신 장군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장군은 벼슬을 단념하고, 이웃들에게 덕을 베풀며 살다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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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 노씨 재실 전경 대전시 유성구 문지동 전력연구원 내 신창 노씨 재실 전경 ⓒ 김선재

 
"노세신 장군님의 자(字)는 덕이(德而)이고 호(號)가 노산(魯山)이에요. 술 이름이 왜 '노산춘'인지 여쭤보시는 분이 계신데, 장군의 호를 따서 술 이름이 '노산춘'이예요. 품계는 선략장군인데 지금으로 치면 대대장 정도 되세요.

제가 이 집에 족보를 봤는데, 장군님 어머님의 기일이 음력으로 2월 25일이에요. 지금 양력으로 치면 3월 말에서 4월인데, 그러니까 기록에 나온 노산춘의 설명 '겨울에 빚어 봄에 먹는 명주'라는 설명이 맞다는 거죠.

장군이 노산춘을 빚은 건 효심이었고, 관리에게 내놓지 않은 건 타협하지 않는 의지였어요. 출세의 유혹에 굴하지 않겠다는 거죠. 이후의 행보도 거침이 없었던 분이었어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이웃에게 나눠줬어요. 사회에서 천대받던 나인, 무녀, 노복들에게도 차별 없이요. 그래서 노세신 장군을 '두레'의 표상으로 봐요.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형식이었던 거예요. 그런 선한 마음과 영향력을 미치신 분이 바로 우리 지역에 있었어요."


노세신 장군은 노년에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주변 이웃들에게 나누었다. 장군께서 돌아가신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연일 찾아들었다.

장례는 장장 13일에 걸쳐 진행됐다. 열흘째 되는 날부터 3일 밤 동안 상여놀이가 행해졌다. 사람들은 상주를 위로했고, 장군의 영혼이 한을 풀고 편히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했다. 그때 상여놀이가 사람들에게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이후 대대로 이어졌고 1990년대에 복원돼 '산소골 상여놀이'로 전해지고 있다.
      
가양주 퇴출, 누룩 규제... 우리술의 위기
         
하지만 문중 술이었던 '노산춘'은 그 명맥이 거의 끊길 뻔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각 가정에서 빚던 가양주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술에 세금을 매기지 않던 나라였다.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일제는 술에서 세금을 걷어, 한때 전체 국세 중 30%를 술 소비에서 거둬들이기도 했다.

일제는 1909년 주세법을 제정해 주조업을 통제하고 세원을 파악했다. 1916년 주세령을 통해 가양주를 차츰 없앴고, 소규모 주조업자만 남겨 술을 산업화했다. 1934년 주세령을 개정했고, 집집마다 빚어먹던 가양주는 완전히 퇴출됐다. 동시에 술을 빚기 위한 핵심 재료, 누룩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대로 집에서 빚던 맑은 술 '청주'의 이름도 그때 빼앗겼다. 우리 술 '청주'는 '약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됐다. 2023년 지금도 '청주'라고 부르고 있는 술의 정체는 우리 전통주가 아닌, 일본식 제조법을 따른 일본식 청주다. 일본 청주는 전통 누룩 대신 코지를 사용하고, 재료인 쌀의 도정율에도 차이가 있다.

"일제가 들어와 조선을 수탈하고,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 중에 하나였어요. 일제가 처음 들어와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죠. 누구네 농토가 얼마가 있는지 조사하죠. 뭘 심었는지, 수확량은 얼마인지도 조사합니다. 그런데 쌀의 많은 부분이 술 빚는데 들어가더란 거죠. 쌀로 떡을 빚으면 양이 1.5배가 되죠. 그런데 술로 만들면 70%만 술이 돼요. 술이야 말로 쌀 소비량의 최고봉입니다. 그렇게 술을 못 빚게 해서 1차로 쌀을 수탈해가고요.

또 원래 술은 화합을 이룰 때 마시게 되죠. 즐거운 것도 화합이지만, 정말로 슬플 때 나누는 술은 마음을 나누는 거예요. 술 먹으면 우리 대동단결 되잖아요. 그런데 일제가 그것들을 탄압한 거예요.

이어서 일본 술이 들어옵니다. 군산지역이 뭐였어요? 쌀을 수탈하던 기지였잖아요. 배로 움직이기 쉬웠고, 각종 물자가 움직이던 곳이죠. 그때 일본이 군산에 지은 양조장이 남아있고, 지금도 여기서 일본식 청주를 만들어 내고 있어요."


1934년 일제는 자가용 주조 면허를 완전히 폐지시켜버리며 우리 전통주의 맥을 끊어 놓았다.

이후 노산춘을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2000년대 노씨 문중 후손이 고문서 기록을 토대로 해서 다시 술을 빚었다. 동국세시기와 규곤요람에 기록이 남아있었다. '충청의 명주 노산춘. 겨울에 빚어 봄에 먹는 술. 술 빚이 맑고 향이 매우 독특하며 부드럽다. 맵쌀 한 되, 찹쌀 한 되, 누룩 한 홉, 물 세 되...' 전문가 도움까지 받았지만 결국 옛 맛을 재현하지는 못하고 실패했다.
      
주령사의 정신을 번쩍 깨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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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빚는 과정 전해져 내려오는 문헌에 나오는 주방문대로 술을 빚어도 맛을 재현할 수는 없었다. ⓒ 이미리

 
그 무렵 이미리 주령사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창 발효 공부에 빠져있었다. 전통 누룩 제조 대가인 김홍기 명인을 찾아가 발효를 배우고 술 빚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2018년 가양주 주인(酒人) 선발 대회에 출전했다. 진행자가 와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출품한 술에 대한 설명을 주고받은 뒤, 진행자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대전에서 오셨네요. 그런데 대전에는 어떤 전통주가 유명하지요?'

"느닷없이 꽝 맞았지.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그 사람 질문에요. 내가 나고 자란 내 지역을, 하물며 내가 나이 오십이 되도록 이걸 모르고 살았구나... 술을 한다는 애가 깊은 공부를 하지 않았구나. 그럼 나 지금까지 뭘 한 거야? 이렇게 스스로에게 되물었어요.

충청도에는 한산 소곡주, 면천 두견주, 계룡 백일주가 있어요. 그 주방문을 내가 다 알죠. 그런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술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대전이 뭐예요. 큰 밭이잖아요. 그 농장물이 어디로 갔겠어요. 너무너무 속상했어요. 그런데 사람은 그런 계기가 있어야 앞으로 나가기도 하잖아요."


이후로 이미리 주령사는 대전 지역 술, 노산춘 복원에 매달린다. 그런데 전해져 내려오는 문헌에 나오는 주방문대로 술을 빚어도 맛을 재현할 수는 없었다. 실패의 원인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찾아낸 실패의 원인은 바로 도량형이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게를 재는 도량형이 달라진 것이었다.
      
이미리 주령사는 현대인 시선에서 벗어나, 과거 조상의 시선으로 다시 시도했다. 문중의 종부를 찾아가 옛날부터 쓰던 됫박이라도 있으면 달라고 했다. 결국 복원에 성공해 냈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할 때, 현재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데요. 그런데 그 당시로 가서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해요. 당시는 몇 월이었느냐, 어느 정도 온도였냐, 그 지역의 바람세기는 어땠냐를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해요.

저도 처음에는 주방문대로 빚었고, 현대의 시점으로만 과거를 바라봤기 때문에 실패가 많았어요. 그런데 곰곰이 깊이 들어가서 보니, 노세신 장군님이 빚었던 술은 그 당시의 것이었단 거죠."

     
요즘 사람들은 전통에 관심이 높지 않다. 그러나 이미리 주령사는 우리가 전통을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강조한다. 전통은 보존이 아니라 계승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보존된다고 하면 그냥 머물러 있는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이미 거기서 정리가 된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거든요. 조선시대의 이야기는 근원은 거기에 두되, 현대에 접목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죠. 누구도 딱딱한 이야기에는 재미가 없어요.

이제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개념으로 지역의 이야기, 농산물, 먹거리, 볼거리를 엮을 필요가 있어요. 저 역시도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하고 싶어요. '노산춘'만 전하는 게 아니라 지역의 안내자가 되고 싶은 거죠. 내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요. 이제는 이 자원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대전은 예로부터 교통의 도시였어요. 이곳 '전민동'도 원래는 '정민역'에서 유래했어요. 조선시대 관리가 말을 갈아타던 곳이었죠. 교통의 요지는 그저 스쳐가는 곳이 아니에요. 사람도 말도 정비하고 쉬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죠. 지금의 대전도 스쳐가는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고 이 지역을 알아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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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지역의 전통주 노산춘 충청의 명주 노산춘. 겨울에 빚어 봄에 먹는 술. 술 빚이 맑고 향이 매우 독특하며 부드럽다. ⓒ 이미리

      
"대전 찾는 이들에게 느림 속 미학 전할 것"

이미리 주령사는 대전 유성을 찾는 이들이 지역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고 가면 좋겠다고 한다. 그저 대기업 자본이 운영하는 상업시설만 들르고 스쳐서는 지역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사람들이 그 곳의 역사와 문화를 잘 배워서 외지인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지역에 잠시라도 머무르고, 스쳐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저는 기회가 되면 노산춘과 함께 향음주례를 알리고 싶어요. 우리 술은 언제 누구와 먹냐에 따른 예법이 있거든요. 달빛 아래 나 혼자 마시는 월하독작이 있죠. 술잔에 비친 달과 이야기도 하고요. 마주 앉아서 먹는 수작이 있고요. 어른과 먹었을 때 예법이 따로 있죠. 이런 이야기를 수업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는 노세신 장군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죠. 지역 주민들과 어울려 살아가신 이야기나 그 분의 효심을 전할 수 있죠. 우리가 먹는 것부터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지 배울 수 있고, 그래서 내 몸부터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겠죠. 내 몸을 이 세상에 오게끔 한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도 배우고요.

아이들이 왔을 때 여기서 피어난 진달래를 따서 화전을 부쳤는데요. 꽃을 먹는 것에 대단히 신기해하더라고요. 그걸 또 진달래 청에 찍어먹었고, 진달래 청을 탄산수에 타서 줬어요. 환타만 먹던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죠."


신창 노씨 재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선산을 한 바퀴 돌아 노세신 장군 묘역을 지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2시간도 넘게 훌쩍 지나있었다.

빠름과 편리함이 미덕으로 추구되는 요즘, 발효와 전통 그리고 옛날이야기는 느리고 오래 걸린다. 하지만 오래되고 느린 것에는 빠른 것이 따라갈 수 없는 깊이와 울림이 있다. 이미리 주령사는 "앞으로도 대전을 찾는 이들에게 그런 느림 속 미학을 전하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남겼다.
#노산춘 #신창 노씨 #이미리 #전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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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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