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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소송, 공수가 뒤바뀌었다... 서두르다 발등 찍은 외교부

[해설] 법원의 공탁 '불수리' 의미... 애초부터 무리했던 '제3자 변제'

등록 2023.07.05 05:53수정 2023.07.0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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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법원 ⓒ 안현주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배상 소송 원고 4명의 채권을 공탁을 통해 소멸시키려는 정부의 시도가 하루만에 암초에 부딪쳤다. 당사자들이 제3자 변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무리한 공탁이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외교부가 공탁 절차를 개시했다고 밝힌지 약 하루가 지난 4일 오후 6시 현재, 총 4건(생존자 2건, 유족 대상 2건) 중 최소한 3건은 정상적으로 접수가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양금덕 할머니(94)에 대한 공탁서는 광주지법에서 '불수리' 결정됐다. 광주지법은 또다른 생존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102)에 대한 공탁 신청도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했다. 또한 고 박해옥씨 유족을 대상으로 한 공탁서 역시 전주지법에서 서류에 문제가 있어 접수가 지연되고 있다.

마지막 한명인 고 정창희씨 유족에 대한 공탁 신청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탁은 채무자가 채무를 갚으려고 하지만 채권자가 받기를 거부하거나 정상적으로 수령하기가 힘든 경우에 일단 법원에 돈을 맡기는 것인데, 채권자의 주소지 관할 법원에 해야 하기 때문에 4건이 한 곳이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있다.

불수리, 반려, 보정권고... 암초 걸린 공탁 전략

광주지법이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공탁을 불수리 결정한 이유는 양 할머니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한다는 명확한 뜻을 법원에 표했기 때문이다. 광주지법 김두희 공보판사는 <오마이뉴스> 통화에서 "양금덕 씨 측 법률 대리인이 3자 변제를 거부하는 명시적인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안다"며 "이를 종합해 법원이 공탁 불수리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식 할아버지에 대한 공탁 신청은 주민등록초본이 누락된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는 서류 미비로 인한 반려 상황인데, 다시 접수한다 하더라도 역시 불수리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 할아버지 역시 거부 의사를 밝혀온 데다, 관할 법원이 양 할머니와 같은 광주지법이기 때문이다.

전주지법에서 고 박해옥씨 유족을 대상으로 한 공탁 신청이 접수되지 않은 이유는 피공탁자가 유족이어야 하는데 망자로 적어서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탁관이 보정권고를 한 상황이다.

불수리뿐 아니라 서류미비와 서류오기 등으로 공탁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현 상황은, 정부의 공탁이 허술하고 급하게 진행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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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공탁 절차를 개시한 가운데, 4일 오후 외교부앞에서 ‘대일굴욕외교, 역사정의-피해자 인권 짓밟은 윤석열 정부 규탄 - 공탁 철회 긴급기자회견’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피해자 측, 천금같은 시간을 벌다

법원에 의해 최소 1건(양금덕), 최대 4건 모두 불수리 결정이 날 가능성이 있는 현 상황은 공탁을 강행해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기업의 법률적 채무를 신속히 해소시키려 했던 정부로서는 큰 암초를 만난 격이다. 양 할머니 건에 대한 광주지법의 불수리 결정이 알려지자마자 외교부가 "강한 유감",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 침해", "유례 없는 일" 등 수위 높은 반응을 내놓은 건 그만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반증한다. 정부는 지난 3월 이후 각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3자 변제 속도전을 펴왔다.

무엇보다 공격과 수비가 뒤바뀌게 됐다. 당초 3일 정부가 공탁 절차 진행을 발표했을 때, 향후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반발하는 피해자 측이 공탁 무효 소송을 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탁으로 인해 법률적인 채무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이 공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정부가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관련 법령에 따르면, 공탁 신청 불수리가 나면 이의를 신청할 수 있지만, 공탁관이 이의 신청이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관할 지방법원에서 다퉈야 한다. 법원도 불수리가 맞다고 결정하면 정부는 불복해 항고할 수 있다. 외교부는 "즉시 이의절차에 착수하여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라고 밝힌 상황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비로소 공탁 신청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예고됐던 피해자 측의 공탁 무효 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신속한 처리'에는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는 셈이다. 이 사건에서 속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미 진행중인 피고인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와 관련한 법원 절차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원의 불수리는 향후 공탁 무효 소송이 진행되더라도 정부 측이 불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애초부터 이번 공탁은 법리적으로 무리라는 견해가 많았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를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피고 일본 기업이 아니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소위 '판결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근거로 민법의 제3자 변제 법리를 펴왔다.

하지만 해당 조항인 민법 469조에 따르면,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제3자 변제가 불가능하다(1항). 또한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2항)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에 정부가 공탁 절차를 개시한 피해자 4명은 모두 명시적으로 재단의 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외교부가 나서서 마치 법적으로 가능한 일을 하는 것처럼 포장해왔지만, 결국 무리수였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공탁은 변제자가 할 수 있는 것인데, 재단의 이른바 판결금 지급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고 밝힌 상황에서 제3자는 변제자가 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공무원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이 적법한 행위인지를 이제 오히려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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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광주·전남지역 81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3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전일빌딩245 NGO지원센터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용기있는 투쟁과 함께하는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 안현주

#공탁 #제3자 변제 #강제동원 #외교부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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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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