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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시발점인 이곳을 철거한다고요?

[답사기] 정권 따라 휘둘리고 부정당하는 민주화운동의 역사, 이대로 괜찮을까요

등록 2023.07.31 14:19수정 2023.07.3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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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된 자연과학관(옛 상학관) 건물. 당시의 상황을 지켜본 부산대 내 몇 안 되는 건물로, 철거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을 존치시키려는 게 이 글을 쓴 가장 큰 이유다. ⓒ 서부원

 
"재작년까지만 해도 찾아오는 이들로 북적거렸는데, 정권이 바뀐 뒤로는…"
 

부산대학교 내 부마민주항쟁(아래 부마항쟁) 사적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민주화운동이 정권의 향배에 휘둘리고 부정당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최근 들어 찾아오는 외지인도 거의 없고 부산대 재학생들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서, 현대사에 무관심하고 조변석개하는 세태를 꼬집기도 했다.

지난 22일, 광주의 교사들 서른 명이 부마항쟁이 발화한 부산대학교를 찾았다.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연원을 거슬러 찾아가려는 답사였다. 특히 부마항쟁에서 10.26 사태, 12.12 군사쿠데타, 서울의 봄을 지나 5.18로 이어지는 1979년~1980년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다.


4대 민주화운동 중 하나인 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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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부산시내를 향해 나선 옛 정문 옆 무지개다리 모습. ⓒ 서부원

 
사실 현대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이들조차 부마항쟁은 왠지 낯설어한다. 학계에선 해방 후 우리나라 4대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우뚝하지만, 일반인들에겐 나머지 셋에 견줘 존재감이 미미한 실정이다. 참고로, 4대 민주화운동이란 시대순으로 4.19 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1979년 10월 16일~20일 부산-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반 독재 시위사건인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겨울 공화국'으로 불리던 엄혹한 유신 정권을 끝장낸 직접적 계기였다. 그해 10월 16일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친 부산대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시민이 합세하고, 이틀 뒤인 18일 이웃한 마산으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유신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을 동원해 억눌렀다. 

대학생들의 단순한 데모가 아니라 자발적 시민 항쟁으로 비화한 실상을 직접 목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선무가 필요함을 역설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거론하며 그의 건의를 묵살했다. 직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저격하며 유신 정권은 종말을 맞는다. 부마항쟁이 시작된 지 꼭 열흘 만인 10월 26일의 일이다.

김재규의 증언 등을 토대로 당시 부산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는 5.18 광주의 그것과 완벽한 데칼코마니다.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부터 시위대의 모습, 주변 상황 등이 데자뷔처럼 똑같다. 시민들은 시위대에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눠주고, 학생들이 군인에 쫓기면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상태였다.

투입된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 모습도 같았다. 그들은 시위대를 향해 곤봉과 군홧발 세례를 퍼부었고, 개머리판을 이용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총 끝에 대검을 꽂아 시민을 위협하기도 했다. 와중에 마산에선, 길 가던 시민 한 명이 계엄군의 폭력에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부검까지 해놓고선 보름이 지나 유족에게 알리는 만행마저 서슴지 않았다.


부마항쟁 때 시위의 강경 진압을 주도했던 제3공수 특전여단은 7개월 뒤 광주로 건너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당시 유혈 진압에 앞장선 제3공수 특전여단의 잔혹함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시민들을 몸서리치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부마항쟁은 '연습'이었고, 5.18 광주는 '실전'이었던 셈이다.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유신 정권은 존속되었을 테고, 느닷없는 신군부의 등장과 5.18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오를 떠나 해방 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박정희라고 한다면, 부마항쟁은 현대사의 변곡점으로서 기념비적 사건이다. 부산을 '야도(野都)'라고 칭하는 것도, 거슬러 오르면 부마항쟁에 닿아 있다.

지난 2005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면서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만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마저도 5.16 군사쿠데타를 찬양해온 이들이 진상규명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어처구니없는 혼선이 빚어졌다.

32년 만의 한풀이, 그러나  

정부가 부마항쟁 당시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첫 공식 사망자를 인정한 건, 특별법이 제정된 지 5년 뒤인 지난 2018년의 일이다. 그는 마산에서 길 가다 곤봉에 맞아 숨진 고 유치진씨로, 무려 32년이 지나서야 억울함을 벗었다. 만시지탄이지만, 32년 만에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2019년 정부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당시 마산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기념식은 정부가 처음으로 주관한 행사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그 뜻을 기렸다. 이후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는 관련 음악회와 공연, 학술 토론회, 시민 강좌 등이 줄을 이었다. 바야흐로 부마항쟁의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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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10.16 기념관의 입구 모습.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건물 옆으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의 사진이 박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가이드의 전언에 따르면, 이름만 10.16일 뿐, 부마민주항쟁과 관련된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 서부원

 
그러나 봄꽃이 다 피기도 전에 된서리를 맞았다. 불과 한두 해 만에 봄에서 겨울로 퇴행해버렸다. 작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부산시장과 시의회까지 보수성향 일색으로 재편되면서, 진상규명과 역사 재평가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부마항쟁은 데면데면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부마항쟁이 발화한 곳인데도, 가이드의 도움 없이는 사적지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됐다.

특히나 부산대 교정엔, 과거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다짐을 적은 그 흔한 현수막 하나 찾아보기가 어렵다. '10.16 기념관'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을씨년스럽다. 가이드의 전언에 따르면, 이곳이 '김영삼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한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부마항쟁의 이름을 딴 부산대 안의 유일한 건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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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관(옛 도서관) 옆에 세워진 부마민주항쟁 표지석. 워낙 건물이 우람해 왜소해 보인다.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쇠귀체를 집자한 것이다. ⓒ 서부원

 
'현대 건축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새뜻한 부산대 교정에서 부마항쟁 당시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옛 정문과 무지개문, 웅비의 탑 등 상징물을 빼면, 현재 인문관으로 사용되는 옛 본관 건물과 박물관, 자연과학관 정도가 고작이다. 시위대가 어깨 겯고 구호를 외쳤던 운동장마저 반쯤 잘린 채 출입이 금지된 잔디밭으로 꾸며져 있다.

기실 부마항쟁을 지켜봤던 상징물과 건물, 운동장은 모두 사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마다 서려 있는 사연들을 이어붙이면, 곧 부마항쟁의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문제는, 사적지가 몇 남지도 않았는데 건물마다 낡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 자연과학관, 당시의 상학관 건물이 대표적이다. 철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을 가이드에게서 한 번, 대학 사무실 관계자로부터 한 번 총 2번을 확인했다.

당시 경제학과 2학년이었던 정광민이 10월 16일 오전에 선언문을 배포하고 학우들 수십 명을 이끌고 도서관을 향해 뛰쳐나간 곳이 바로 상학관이다. 이후 삽시간에 시위대가 수백, 수천 명으로 늘어나 교문을 돌파해 부산 시내로 진출하면서 시민 항쟁으로 비화했다. 곧, 부산대 안에서도 상학관이야말로 부마항쟁의 시발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표지석이라도 세울 법도 하건만, 정작 그곳을 드나드는 재학생들조차 건물이 품은 역사를 모른다. 국가기념일 지정에 맞춰 부마항쟁기념재단이 옆 빈터에 보일락 말락 세워놓은 작은 조형물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시위대가 자생적으로 집결한 당시 도서관 자리엔 우람한 최신식 건설관이 섰는데, 그 앞에 설치한 부마항쟁 기념비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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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중항쟁탑.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 부산대 교정에 세워진 첫 번째 기념물로, 정면에는 항쟁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 서부원

 
'10.16 기념관'을 제외하면, 부산대에서 가이드의 도움 없이 부마항쟁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는 '부마민중항쟁탑'이 자리한 작은 정원뿐이다. '부마민중항쟁탑'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에 설치한 첫 번째 기념물로서 의미가 깊다. 그 둘레로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부산대 출신 열사들의 추모비가 늘어서 있다.

답사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려니 서운한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마항쟁이라는 가슴 벅찬 역사를 정작 부산대에선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감추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념물은 왜소한 데다 엉뚱한 자리에 세워져 있었고, 교정의 안내판은 너무나 부실했다. 그마저 부산대가 아닌, 기념재단과 민주동문회 등 외부 기관에서 세웠다고 한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어깨 겯고 뛰었던 운동장은 민주주의의 열망을 애써 지우려는 듯 '넉넉한 터'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중에도 옛 상학관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다는 건 내게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공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는 법인데, 부산대가 스스로 부마항쟁의 유산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닌지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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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수천 명의 시위대로 어깨 겯고 돌았던 부산대 운동장은 '넉넉한 터'로 이름을 바꾸고 잔디밭으로 꾸며진 채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현재 인문관으로 사용되는, 당시의 본관이다. ⓒ 서부원

 
"작년에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부마항쟁이 부산대의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각인될 수 있었을 텐데…"

헤어지는 자리에서 가이드는 부마항쟁에 대한 광주 교사들의 관심에 감사하다며 회한 섞인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당분간 진상규명과 역사 재평가를 위한 노력도 다소 멈춰져 있게 될 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길 국가보훈부가 현충원 홈페이지에서 백선엽의 친일 행적 문구를 삭제한다는 뉴스가 떴다. 정부가 앞장서 친일파를 애국자로 추앙하는 퇴행의 시대, 자칫 부마항쟁을 거론했다가는 '빨갱이'로 치도곤당할지도 모른다는 '웃픈' 생각마저 들었다.

사족. 지난 24일 부산광역시 금정구는 부산대 정문에서 도시철도 1호선 부산대역에 이르는 440m가량의 도로명을 '10.16 부마민주항쟁로'로 지정한다고 고시했다. 부산대생들마저 부마항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굳이 10.16이라는 날짜를 명기했다고 한다. 지방정부의 조처엔 박수를 보낼 일이나,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부산대 구성원의 관심과 노력이다.

부산대 안의 사적지조차 관리가 허술하고 잊히는 마당에, 지방정부의 도로명 지정은 톱니바퀴가 헛도는 느낌마저 든다. 4대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추앙받는 부마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전승하는 건 부산대의 의무다. 명토 박건대, 부산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립대학이다.
#부마민주항쟁 #부산대 자연과학관 #부산대 10.16 기념관 #부마민중항쟁탑 #정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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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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