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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정부의 힘이 막강한 벨기에 정치

[벨기에] 의회 정치가 가진 힘

등록 2023.08.18 15:54수정 2023.08.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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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옅은 비가 내리는 브뤼셀의 날씨는 여름답지 않게 추웠습니다.

파리에서 국경을 건너 벨기에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모두 쉥겐 협정에 가입한 국가이기 때문에, 별도의 출입국 심사도 없습니다. 제가 정말 국경을 넘어온 것이 맞나, 순간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것은 있었습니다. 기차역의 안내판이었습니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쓰여 있더군요. 브뤼셀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공용어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제야 브뤼셀에 도착한 것을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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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브뤼셀의 거리 ⓒ Widerstand


세상에 두 개 이상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벨기에만큼 독특하게 두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6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 지배에서 먼저 독립한 것은 네덜란드였죠. 1568년에 식민지 17개 주 가운데 7개 주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7개 주는 주로 개신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을 믿고 있던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었겠죠.

이때 반란에 참여한 7개 주가 후일의 네덜란드가 됩니다. 80여 년의 전쟁을 거친 뒤의 일이었습니다. 주로 가톨릭을 믿고 있던 나머지 10개 주는 한참 뒤,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벨기에로 독립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10개 주 가운데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컸던 것이죠. 남부에 있었던 7개 주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북부 3개 주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했죠. 심지어 북부 3개 주에는 개신교도 인구도 상당했습니다. 북부 3개 주는 한때 독립을 위한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스페인에 의해 곧 진압되어 독립 반대파로 돌아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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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독립을 그린 왕립미술관의 회화 ⓒ Widerstand


벨기에 왕국이 독립한 뒤에도 지역 사이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지역 사이에는 경제적인 여건도 달랐습니다. 과거에는 공업 지대가 위치한 프랑스어권이 더 부유했죠. 지금은 서비스업을 위주로 성장한 네덜란드어권이 더 부유합니다. 경제적인 격차는 언어권 사이의 갈등을 더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재 벨기에 인구의 55%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합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36% 정도죠. 나머지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사용하는 인구죠. 여기에 인구 비율은 1% 미만이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도 있습니다. 1차대전 이후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가져온 지역에 사는 이들입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이중언어 화자, 게다가 소수의 독일어 화자까지. 다양한 언어 집단이 벨기에에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정도는 두 개 이상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늘 있는 일이죠. 오히려 독특한 것은, 벨기에가 그 갈등을 제도화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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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궁 ⓒ Widerstand


벨기에는 물론 하나의 국가입니다. 벨기에 국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면서,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죠. 벨기에 국민은 벨기에 국회의원을 선출하죠. 국회에서는 중앙정부를 구성합니다. 중앙정부는 국방, 외교, 복지, 금융정책 등 거시적인 정책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벨기에 정치의 특징은, 지방정부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벨기에의 지방정부는 세 지역으로 나뉩니다. 플란데런, 왈롱 그리고 브뤼셀이죠. 플란데런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지방입니다. 왈롱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방이죠.

브뤼셀은 인구 대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모두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중언어 지역입니다. 이 세 지방정부에서 교통, 관광, 보건 등의 구체적인 사무를 담당합니다.

이 정도라도 독특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저 강력한 지방자치를 가진 국가 정도겠죠. 하지만 벨기에에는 지방정부와 별도로 '언어 공동체 정부'가 존재합니다. 네덜란드어 공동체, 프랑스어 공동체, 독일어 공동체가 존재하죠.

네덜란드어 공동체는 플란데린 지방과 브뤼셀의 일부 네덜란드어 화자를 포괄합니다. 프랑스어 공동체는 왈롱 지방과 브뤼셀을 포괄하죠. 독일어 공동체는 소수의 독일어 화자를 대변합니다. 이 공동체 정부에서는 언어와 지역 문화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합니다.

지방정부와 언어 공동체의 경계가 거의 일치하는 플란데린은 별도의 의회까지 꾸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어 공동체는 '왈롱-브뤼셀 연방'이라는 공동체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죠. 독일어 공동체 역시 '오스트벨기엔'이라는 공동체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벨기에 국민은 벨기에라는 국가, 소속된 지방 정부, 사용하는 언어권의 공동체 정부라는 세 정부의 지배를 별도로 받고 있는 셈입니다. 벨기에 중앙정부는 국회와 각 지방의회, 언어권 의회까지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만 총리를 선출하고 내각을 꾸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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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플라스의 동상 ⓒ Widerstand


이렇게 복잡한 지방자치는 결국 국가 정치의 마비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2010-2011년에는 541일 동안 내각을 꾸리지 못한 무정부상태가 이어졌죠. 기네스북에도 오른 세계 최장 기록입니다. 2019-2020년에도 493일의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죠. 총선이 끝나면 수 개월 동안 이어지는 무정부 상태는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벨기에는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년 넘는 무정부 상태에도 벨기에라는 국가와 정부의 형태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수백 일의 협상 끝에, 중앙정부를 구성해 냅니다.

저는 그것조차도 의회정치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든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의회정치의 본질이니까요. 긴 시간을 거치더라도,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끝내 정부를 구성해내는 것이 역설적으로 벨기에 의회정치가 가진 힘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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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집행위원회 ⓒ Widerstand


벨기에는 서로 다른 언어와 지역 간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국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브뤼셀은 그런 연합의 수도가 되는 셈이죠. 재밌는 점은, 벨기에라는 연합 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연합도 브뤼셀에 수도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수도라는 지위가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연합의 행정부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브뤼셀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럽의회의 제2청사도 브뤼셀에 위치해 있죠. 브뤼셀이 유럽연합의 수도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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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앞의 국기 ⓒ Widerstand


생각해보면 유럽연합도 벨기에라는 연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정치의 경험을 가진 국가들이 모여 연합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니까요.

그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 것은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쉽고 평탄한 과정만을 예상하고 모인 것은 아닐 테니까요. 때로는 연합이 만들어낼 미래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벨기에라는 연합처럼, 유럽연합 역시 오랜 기간 위기의 시대를 거쳐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수백 일의 진통 끝에도, 결국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의회정치가 수행하는 역할이지요. 유럽연합이라는 국가연합의 역할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브뤼셀에 머무는 내내 비와 바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찬 바람이 부는 골목을 걸어가며 생각했습니다. 브뤼셀은 위기와 극복이 늘 함께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브뤼셀이아말로 유럽연합의 수도라는 이름에 가장 적절한 땅일지도요. 언젠가 이 바람이 그치고 보일, 브뤼셀의 맑은 하늘을 상상합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벨기에 #브뤼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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