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 블라스 이글호크 퀴베 브뤼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라운 가성비의 와인이다.
임승수
울프 블라스 이글호크 퀴베 브뤼. 울프 블라스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제법 인지도 있는 호주 와인 회사다. 이글호크는 제품명, 퀴베 브뤼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비싼 와인은 찾아보기 힘든 내 셀러 안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 최저 몸값인지라 프로야구단의 만년 후보선수처럼 제일 밑에 처박아두었다.
라벨 때깔이 달라 보이네
며칠이 지났다. 뜬금없이 포케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요청이 있어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갑작스레 특정한 음식이 떠오르는 날에는 십중팔구 술도 마시게 된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 애지중지하는 선발투수를 올릴 수는 없으니 부담 없는 패전처리 투수를 마운드로 호출했다. 셀러 저 밑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이글호크 말이다. 최저연봉 선수이니 실패하더라도 본전 생각이 덜하지 않겠는가.
배달 그릇에 담긴 채소와 곡물을 아무렇게나 퍼서 입에 쑤셔 넣은 후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다가 별다른 기대 없이 패전처리 투수의 공을 구강으로 받아냈다. 순간 사백안이 될 정도로 눈이 번쩍 뜨였다. 어럽쇼? 이거 뭐지? 시속 98마일의 꿈틀대는 강속구는 아니지만, 대략 89마일의 패스트볼이 타자 무릎 높이로 날아와 아웃코스 꽉 차게 꽂힌다. 이건 최저 연봉자의 기량이 아닌데?
자세를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린 후 재차 날아오는 투구를 구강으로 받았다. 느낌이 왔다. 이건 진짜배기다. 약팀이라면 5인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맡길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할인가 9,900원이라니! 함께 마시던 아내도 칭찬에 동참한다. 라벨에 그려진 수리매(이글호크)의 때깔이 달라 보일 정도다.
패전처리로 나와서 이 정도 기량을 보여줬다면 중요한 시합에 선발투수로 내세워서 제대로 검증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글호크 재구매를 위해 다시 마트를 방문했는데 아쉽게도 할인 기간이 끝나 가격이 14,800원이 되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전성기의 류현진 수준으로 제구된 89마일 직구의 짜릿함을 떠올리면 14,800원 역시 가성비 연봉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 시합은 곁들일 음식으로 스시를 선택했다. 내가 스파클링 와인을 마실 때 선호하는 음식+와인 조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내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다. 특정 음식이 4인 가족 구성원 모두를 빠짐없이 만족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스시는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내는 훌륭한 음식이다. 다소 비싸서 자주 못 먹는 게 아쉬울 뿐.
만날 시키던 데 말고 좀 새로운 데서 시켜보라는 아내의 타박에 배달앱 평점, 네이버 평점 등을 두루두루 살펴보다가 한곳을 골랐다. 배달 스시집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식도락가의 혓바닥은 배율이 높은 현미경과도 같아서 한 끗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 먼 우주에서 보면 이 거대한 지구조차 파란색 점 하나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미각에 있어서는 여전히 망원경보다는 현미경 쪽을 선호하게 된다.
드디어 초인종이 울리고 초고배율 전자현미경과도 같은 나의 혓바닥을 가동할 순간이 왔다. 뚜껑을 열고 맨 처음 집어 든 건 뿔소라를 올린 녀석이었는데 일단 소라가 큼직하니 인심이 좋아서 합격이다.
와인을 마실 거라 굳이 간장에 적시지는 않았다. 냉큼 입안으로 투하해서 치아로 절단해가며 초고배율 관찰에 들어갔다. 뿔소라 특유의 탱글탱글하다 못해 당돌한 식감이 저작운동마다 느껴지는 가운데, 동아시아 태생 쌀이 그 특유의 진득한 끈기로 뿔소라 잔해 사이의 공간을 메워준다. 그래! 역시 이 맛에 스시를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