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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지

최은영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등록 2023.08.25 08:01수정 2023.08.2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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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글은 한결같다. 연대를 통해 함부로 대해지는 연약한 사람들을 보듬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외면받고 있다. 어딘가로부터 결핍이 있고,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멍을 안고 사는 주인공들이지만 그들 주위에는 위로가 되는 존재가 있다. 작가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작은 온기와 희미한 빛을 찾는 사람들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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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희미한빛으로도 최은영 <아주희미한빛으로도>표지. ⓒ 문학동네

 
7개의 단편 속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관계성은 다양하다.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직장동료, 엄마와 딸, 이모와 조카, 언니와 동생... 앞선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밝은 밤>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 어디선가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를, 아니 어쩌면 그게 '나'일지도 모를 화자에게 공감의 유대를 이룰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가진 불안이 괜찮다고 느끼게 해주는 이유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 '일 년'  115p)
 
단편 '일 년'에 등장하는 정규직 사원 지수와 계약직 인턴 다희는 동갑내기다. 조심스러운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은 카풀을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둘은 점차 마음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지수는 스며들 듯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
 
그녀가 퇴원하기 전날에도 다희는 그녀를 찾아와 곁에 머무르다 갔지만, 다희도 그녀도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 퇴원하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안방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 - '일 년' 124p)
 
지수는 다희와 나눈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타인에게 나의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타인의 어디까지 들을 수 있을까. 스스럼없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고, 잠자코 듣다가 너무 많은 것을 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는 감정을 지수는 경계했다.

그리고 8년 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로를 대하며 반가워하는 듯 보이지만, 이미 벌어진 틈은 다시 붙일 수 없었다. 둘의 삶은 여전히 포개어질 수 없고, 서로의 삶은 비켜선 채 다시 멀어져 갈 테지만,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언젠가 이모에게 왜 나를 데리고 옛 일터를 갔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모는 뜬금없이 내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모가 그렇게 믿고 있기를 바란다. 나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자신의 삶과는 다르다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미소 짓기를, 안심하기를. - '이모에게, 264p)
 
또 다른 단편 '이모에게' 속 희진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이모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남겨진 이모의 흔적을 되짚는다. 이모는 차갑고 늘 엄격했다. 이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희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이모를 보고 독립을 결심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희진이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깨닫게 된다. 이모는 이모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모와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희진은 이모와 작별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떠나는 순간에 이모는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가서 나 보란 듯이 잘 살아."(p265)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엄마 기남은 홍콩에 사는 둘째 딸 우경의 집에 처음 방문하게 된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긴 만큼 모녀 사이엔 보이지 않은 선이 있다.

기남은 딸 우경을 어려워한다. 반면 우경의 아들 마이클은 기남에게 살갑게 군다. 공항에서는 가방을, 백화점에서는 핸드폰을, 자꾸 뭔가를 잃어버린다며 우경은 기남을 나무란다. 딸의 눈치를 보는 기남에게 마이클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묻는다.
 
부끄러워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기남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모르는 마이클은 자리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했다. 여자친구 에밀리에 대해서, 바다거북의 산란지인 카보베르데에 대해서, 그곳에서 태어난 새끼 거북들이 어떻게 바다를 향해 가는지에 대해서...  -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319p)
 
아홉 살부터 식모 일을 해왔던 기남은 항상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았다. 그녀에겐 그게 당연했고, 그래서 아무도 그녀의 보살핌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런 기남의 마음을 마이클이 돌봐준다. 부끄럽냐는 말 한 마디가 쥐여준 감정은 낯설기도, 어색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나쁘지만은 않다.


소설 속 세대를 넘어 확장되는 여성들의 관계는 다소 서툰 구석이 있다. 그러나 내가 겪은 아픔과 고통을 네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분명한 마음이 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분명한 희망. 그것이 아주 희미한 빛일지라도, 괜찮다. 최은영의 소설은 뜨겁지 않은, 내 곁에 누군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온기를 남긴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미 겪었거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 앞에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네가 나였다면 그 순간 어떻게 했을 것 같니"(170p)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속 주인공처럼 '나도,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몫'의 희영처럼 글을 잘 쓰고 싶었고, '일 년'의 다희처럼 스스럼없이 진심을 드러내고 싶었다. '파종'을 읽으면서 소중한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고, '답신'을 읽을 땐 폭력에 몸이 떨렸다. '이모에게' 속 이모를 보고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법을 배웠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속 기남처럼 너무 다정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_작가의 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은이),
문학동네, 2023


#최은영 #아주희미한빛으로도 #문학동네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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