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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에이릭 하게네스, 세 명의 엄마가 있습니다

[인터뷰] 노르웨이 입양 한인, 에이릭 하게네스 해외입양인연대 사무총장의 이야기

등록 2023.09.03 10:33수정 2023.09.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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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화) 국내 최대 해외입양인 당사자 단체인 '해외입양인연대(Global Overseas Adoptees' Link) 'GOAL(골)' 사무총장 에이릭 하게네스(42)를 연대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노르웨이 입양인으로 성장한 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오면서 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그의 삶은 해외입양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2 연재는 시즌1과 달리 국내입양과 해외입양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낼 예정이다.[편집자말]
엄마가 한강에서 자살했다. 그는 6살이었다. 얼굴이 커서 무서웠던 기억으로 남은 아빠는 그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6개월을 지냈다. 어린아이부터 큰 형들까지 너무 많은 아이들이 한방에서 지냈다. 회상하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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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부모로 알고 있었던 첫 국내입양가정에서. 양모가 자살하고 고아원에 가기 전 동네에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놀던 시절이다. ⓒ 에이릭하게네스

 
종로에 있던 고아원 담벼락을 뛰어넘어 마포 집으로 도망쳤다. 벌써 재혼해 살고 있던 아버지는 그를 다시 고아원으로 넘겼다. 지금도 잔상으로 남은 생애 가장 어두운 6개월이다.

입양 가는 줄 알고 있었다. 노르웨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과자와 사진이 든 소포가 오고 있었다. 좋았다. 설레게 기다렸다. 고아원만 아니라면 어디든 관계없었다. 아빠는 그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고 해외입양 동의서에 사인했다. 

'이동헌'에서 '에이릭 하게네스'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차로 8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도착한 집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일어나 창가에 섰을 때 거대한 풍경이 그를 압도했다. 창문 너머로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피오르였다. 

그가 꺼낸 첫마디가 '한강'이었다고 훗날 양부가 전해주었다. 1989년 그의 나이 7살이었다. 한국에서 이동헌이었던 그의 이름은 에이릭 하게네스가 되었다. 그가 살던 송내피오르는 인구가 2000여 명 정도의 작은 타운이었다. 

보수적인 성격의 양부는 엔지니어였고 개방적이고 따뜻한 성품의 양모는 헤어드레서(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위로 8살 많은 형이 있었다. 형도 18개월 때 양부모가 한국에서 입양했다. 두 분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가 가고 2년 뒤 성격 차이가 확연했던 두 분은 이혼했다. 그는 엄마와 형은 아빠와 살기 시작했다. 이혼은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의 감정이었고 관계였기에 그는 가까이 있는 두 집을 오가며 가족들과 관계를 이어나갔다. 특히 같은 한국 입양인 출신이었던 형은 그에게 각별한 사람이었다. 


노르웨이라고 아이들과 노는 게 달라질 건 없었다. 서울에서 고아원에 가기 전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매일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했던 시절이다. 백인사회에 유일한 아시안이어서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만한 수준의 놀림이어서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특히 축구는 발군의 실력으로 지역 내셔널 팀에 소속될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불행했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지만 그걸 떠올릴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열네 살에 멈췄다. 

형이 죽었다. 혼자 자동차를 운전하며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피오르 길을 지나다 절벽으로 떨어졌다. 스물 두 살이었던 형은 건축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 차가 있어 일상을 공유하진 못했지만 가장 가까웠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형의 죽음이 준 충격은 강렬했고 강력했다. 그는 우울과 절망에 빠져 무기력한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아침에 삶의 목표가 사라져버렸다. 운동을 그만두었고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집에서 독립했다. 노르웨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독립은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목표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을 따라갈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바로 진학했다. 이번에는 집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기술을 배우면서 바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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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입양 후 가족들과 함께 ⓒ 에이릭하게네스

 
사회학을 1년 공부했다가 간호학과로 옮겨 3년을 더 공부한 후에 다시 IT 공부를 했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오게 된 건 2011년이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20여 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이었다. 그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비자 문제로 입양기관을 찾았다. 입양확인서가 필요했는데 서류를 보던 직원이 그에게 뜻밖의 놀라운 얘기를 했다. 그를 낳은 생모가 찾고 있다고 했다. 생모라니. 한강에서 숨진 엄마가 살아 돌아올 리 없었다. 한국말이 서툴러 자신을 입양 보낸 아빠를 만날 생각도 미루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생모라니. 

죽은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도 놀라웠고, 갑자기 낳아 준 엄마가 찾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극심한 혼란이 일었다. 일단 좀 생각해 봐야겠다고 하고 거절했다. 그런데 직원은 더 놀라운 얘기를 했다. 어린 나이에 그를 낳은 엄마와 아빠가 뒤에 결혼을 했고 두 딸을 더 낳았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움에 차가워졌던 그의 마음이 친여동생이 둘이나 있다는 말에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만나겠다고 했다. 상봉 전에 오만가지 마음이 들었는데 정작 당일이 되니 덤덤해졌다.

생모가 그를 낳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출산 전 그의 입양을 결정한 사람들은 생부의 부모와 형이었다. 그가 철석같이 생부모로 알고 있었던 사망한 엄마와 그를 입양 보낸 아빠는 사실은 그의 첫 번째 입양부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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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많은 한국입양인 형이 죽기 일 년 전인 열 세 살 때. 공부도 운동도 잘했던 행복했던 시절이다. ⓒ 에이릭하게네스

 
고등학생 엄마가 출산한 직후 국내입양 되었다가 7년 후 파양되고, 고아원에서 6개월을 지내다가 해외입양 보내졌던 일련의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를 낳은 엄마를 만나고 두 여동생도 만났지만 생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언어와 세대문화의 차이로 생모와의 소통이 쉽진 않았다. 대신 여동생들과는 빠르게 친해졌다. 여동생들은 그가 없는 노르웨이로 여행을 가서 양부모를 만나고 그 집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양부모님도 한국에 들르면 동생들과 함께 지낸다. 한국의 생부모 가족과 노르웨이의 양부모 가족이 사촌들까지 한 가족처럼 지내는, 보기 드문 흐뭇한 진풍경이다. 

그를 입양해서 7년을 함께 살다 고아원으로 보낸 양부를 만난 건 그가 한국에 와서 십 년이 지난 2021년이었다. 그전에라도 만날 수 있었지만 한국말을 먼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절차에 따른 입양이었고 한동안 사진을 보내주었던 양부의 주민번호도 있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마음이 먹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늦게 찾아왔다고 서운해했던 양부는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는 양부와의 만남이 감동적이었고 행복했다. 유년시절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던 즐거웠던 추억과 고아원에서의 암담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았지만 젖먹이인 그를 7년을 키워 준 분이다. 지금도 간간이 연락을하고 살지만 더 이상 깊은 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에 와서 모든 게 바뀌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노르웨이에서는 하루 수업이 2시간 정도였지만 한국 대학은 수업도 많고 동아리도 많아서 대학 생활 안에 흥미로운 시간을 가득 채울 수 있어 좋았다. 

고백하자면 처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올 때 어떤 계획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모든 게 바뀌었다. 우연한 기회에 생모와 두 여동생을 만나게 되고 노르웨이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대학생활과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 등으로 인해 생의 활력이 생겼다. 

자신이 펄펄 살아 있다는 생동감을 느꼈고 삶의 목적이 생겼으며 그것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 혁명 같은 일이었다고 했다.

교환학생으로 일 년을 보내고 8개월 뒤 그가 서둘러 한국을 다시 찾았던 이유였다. 한국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사업도 하고 회사에도 다녔던 그는 4년 전 국내 최대 해외입양인단체(Global Overseas Adoptees' Link) 'GOAL(골)'의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여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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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입양인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 후. ⓒ 김지영

 
우리나라 해외입양 역사는 전쟁고아로부터 시작되어 추산으로 20만여 명의 해외입양인이 발생했고, 지금도 해외입양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1000여 명의 해외입양인들이 모국에 정착해 생활하고 있고 매 해 수백 명의 입양인들이 모국방문과 뿌리찾기를 한다. 

'GOAL(골)'은 그런 입양인들의 사회정착을 돕고, 해외입양인들의 비자문제와 국적 회복 문제도 도와주는 해외입양인 당사자 단체다. 덕분에 한국에 살면서 해외입양에 대한 서로 다른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의 맥락을 그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와 한국 중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는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국입니다." 그는 한국의 해외입양에 대한 보편적 정서가 부정적인 사실에 대해 일견 수긍을 하면서도 장애나 외형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의 해외입양은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긍정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자신이 살던 이웃 마을에 한국에서 온 외형으로 보이는 특이 체질의 입양인이 있었는데, 아무런 제약도 차별도 편견도 없이 새로 만난 가족 안에서 보통의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성장하는 모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를 거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부든 학력이든 지역이든 직장이든 외모든, 여러모로 한국은 차별이 심한 나라지만 그는 비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좁은 나라 안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들이 기회를 다 가질 수 없어 생기는 한계로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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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한국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노르웨이 가족과 한국 가족이 함께 모였다. ⓒ 에이릭하게네스

 
그는 한국에서 약 13년째 살고 있다. 9년 전에는 한국 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아이는 없다. 노르웨이에서 형이 죽고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냈을 때는 한국에서 자랐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만약 그랬다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 

그 차이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한국에서 살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든 노르웨이는 그가 성장한 나라이고 지금의 그를 있게 해 준 부모가 있는 본국이다.

지난 5월 그는 9년 만에 노르웨이를 찾았다. '본국' 하면 아스라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던 피오르를 감동에 겨워하며 마주했고, 이젠 자식을 낳아 어엿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는 동안 이제 자신이 과거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국에서의 십여 년 동안 모르던 삶의 퍼즐을 찾아 맞추었다. 자신을 환대하고 포용해 준 한국 안에서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며 생동감 있는 삶을 되찾았다. 그가 비롯된 곳에서 비로소 그는 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된 것도 바로 그가 태어난 땅 한국에서였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노르웨이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의 삶엔 엄마가 셋이다. 낳아 준 엄마는 곧 그를 포기해야 했다. 포기된 그를 품에 안았던, 존재조차 희미한 엄마는 젖먹이였던 그와 7년을 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멀리 노르웨이에 또 하나의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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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금의 그를 키워준 엄마와 함께 ⓒ 에이릭하게네스

 
에이릭 하게네스를 있게 한 엄마. 한국의 이동헌을 있는 그대로 자식으로 품어준 엄마. 그의 가장 뜨거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충만해지는 그의 엄마는 지금 노르웨이에 산다. 새로운 꿈을 찾아 다시 밟게 될 그의 나라다.
#입양 #해외입양 #입양을인터뷰하다 #노르웨이 #해외입양인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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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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