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재심 기각 결정은 엉터리다"

납북귀환어부 고 양재흥씨 유족이 항고한 이유

등록 2023.08.31 18:44수정 2023.08.3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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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동·서해안에서 조업 중 북한에 장기간 납북 억류되었다가 돌아온 납북귀환어부들은 귀환 직후 대부분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특히 1,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조사한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진실규명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으로 귀환한 후에 불법구금 상태에서 반공법 위반 등 혐의에 관해 수사 받고 징역형이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으며 이와 같은 형사처벌 이후에도 피해자와 그 주변인들에 대한 사찰 등 인권 침해 행위가 계속되었다.

결국 법원은 피해 납북귀환어부의 피해 호소와 진화위 결정 등을 토대로 무더기 재심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참조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2022. 12. 21 선고 2022재고단29 등).

문제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이 형사처벌 받은 이후에도 경찰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끊임없는 사찰을 지속적으로 당해야 했으며, 이러한 사찰 피해자 중에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차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2010년 사이에 활동했던 1기 진화위에서 이러한 2차 피해자들이 다수 신청하여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이상철, 서창덕, 정삼근, 이성국, 김용태, 윤질규, 김춘삼, 김성학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2019년 6월까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 건수는 39건에 이른다("납북귀환어부간첩조작사건피해자구제방안모색을위한국회토론회" 2019.6.4. 이재정 의원실 참조).

1972년 5월 11일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창동호 선원 고 양재흥씨 역시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뒤 재차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 양재흥 씨의 유족은 납북 귀환 당시의 형사처벌이 재심을 통해 무죄선고가 되자 1973년 두 번째로 처벌받은 반공법 위반, 명예훼손에 대한 재심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한 속초지원 재판부(속초지원 형사1단독 2023재고단21)는 지난 8월 10일 재심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기각의 이유에 대해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지은 것이 확정 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또는 그 확정판결을 없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고(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등), 이 때 그 범죄 사실의 존재가 적극적으로 입증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대법원 1994.7.14.자 93모66결정 등 참조)'고 전제한 뒤 1973년 1월 11일부터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은 고 양재흥씨가 1월 13일 구속영장이 집행될 사이에 석방될 가능성이 희박하고, 당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구 형사소송법에 따른 긴급구속의 요건을 갖추어 피고인을 구속하였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변호인의 불법 감금 주장은 적극적으로 증명되기 어렵다며 재심을 기각했다.

이 결정에 대해 변호인과 피해자 유족은 1심 재판부가 불법 수사의 여러 정황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며 재심 결정에 대해 즉시 항고를 신청했다.


먼저 불법감금에 대한 증명이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재판부가 사건을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고 양재흥씨가 최초 고성경찰서에서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날짜는 '1973. 1. 11'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73. 1. 13. 오후 3시 고성경찰서 유치장'에 구속 집행하였다. 법원의 판단대로라면 적어도 이 기간 안에 고 양재흥 씨가 임의로 자유롭게 출석해 조사를 받고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집으로 귀가할 수 있어야 불법 감금이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 고 양재흥씨 집 앞에 살고 있으면서 양씨의 연행을 직접 목격했다는 김 아무개씨는 양씨가 연행된 뒤 석방되어 속초에 돌아올 때까지 집에 돌아온 적이 없다고 했다. 이는 재판부가 불법감금 기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판단과 다른 진술이다.

당시 강원도경 특별공작반이 양씨에 대한 범죄 혐의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다른 참고인들을 조사한 1973년 1월 9일 이전이다. 이미 양씨가 조사받은 1월 11일 이틀 전에 참고인들을 조사하여 양씨의 범죄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참고인 조사 후 법원으로부터 피고인이 도주 또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받아 집행한 점에 비추어 보면 당시 강원도경 특별공작반은 양씨의 범행 사실이 중대한 범죄라는 점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음에도 참고인 조사 이틀 후인 1월 11일 임의수사 방식으로 출석을 요구하여 소환조사를 하고 집으로 귀가시킨 뒤 그로부터 다시 이틀 후인 1월 13일 구속영장을 집행하였다는 점을 상상하거나 상정하기 어렵다(서울중앙지방법원2023로100 망 한삼택 결정문 참조).

또한 당시 수사기록에 따르더라도 강원도경 특별공작반에서 작성한 수사기록이 허위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사건 변호를 맡고 있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파이팅챈스)는 "1973. 1. 12 지휘품신 지시를 한 김동철 검사의 문서에 대한 결재란에 도장이 수사를 담당한 수사관의 도장으로 찍혀있다"라며 당시 수사기록이 경찰에 의해 허위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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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검사의 수시지휘 서류 ⓒ 변상철

 

이 사건은 범죄사실을 다투었던 과거 재판부에서의 사실 오류도 엿볼 수 있다. 1973년 당시 공판에서 '박정희 정권이 독재'라는 발언을 했느냐는 검사와 판사의 질문에 당시 피고인 양씨는 물론 경찰과 검찰조사과정에서 그 발언을 들었다고 했던 증인들 역시 공판에 출석해 모두 '그러한 말을 듣지 못했다'며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발언을 듣지 못했다는 증인들의 주장을 '판시 사실에 부합하는 취지의 각 진술'을 했다며 인정했다는 증거로 채택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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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재판 당시 증인출석해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손00 참고인 진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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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재판 당시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증인 박00의 진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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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당시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박00, 손00이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음에도 판결문에서 판사는 이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며 증거로 사용했다. ⓒ 변상철

 


과거사 재심대상 사건의 대부분은 증거가 부족하다. 그리고 당사자가 이미 사망하거나 고령의 나이로 진술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이 사건 재판의 담당 판사도 재심 기각 결정문에 담았듯, 당시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지속적 사찰과 감시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납북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혐의를 받아 형사 처벌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인지하고 있다면 적어도 재심 대상 판결에 대한 불법 수사 주장이나 근거를 자세히 살펴 그 인과관계를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후 벌어질 항고심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한 재심 사유를 자세히 살펴 과거 무리한 공안사건의 피해자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 결정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소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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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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