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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식엔 참석 못했지만 내 딸도 국가대표입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똑같이 고생한 비인기종목 선수들과 스태프들에게도 응원과 격려를

등록 2023.09.18 14:32수정 2023.09.1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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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가 2주 만에 집에 왔다.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는 딸아이는 선수촌에서 선수들과 합숙훈련 중인데, 제 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2023. 9. 23~10. 8. 현지기준)을 위한 출국을 앞두고 잠시 집에 다니러 온 것이다.


마침 전날이 둘째의 생일이었고, 또 오랜만에 집에 온 아이를 잘 먹이고 싶은 마음에 나는 갈비며 잡채며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해서 저녁상을 차렸다. 술 좋아하는 남편과 그런 아빠를 닮은 딸아이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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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받아온 항저우 아시안게임 기념 패넌트 ⓒ 심정화

 
선수촌에서 TV에 나오는 유명 선수들을 직접 보았다는 이야기부터 선수촌에서의 하루 훈련 일과와 맛있기로 소문난 선수촌 급식 이야기까지 아이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한참 동안 쏟아냈다.

선수 트레이너로 일하는 딸

큰애는 체대 입시를 준비하다가 진로를 바꿔 운동재활을 전공하고 선수 트레이너가 되었다. 아이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기업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랐던 나는 사실 선수 트레이너라는 직업이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아이가 선택한 직업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 주고는 있지만 몇 개월 단위로 계약되는 불안정한 고용과 잦은 합숙생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점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염려를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 바로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이었다. 가방이며 모자며 유니폼에 새겨 있는 다섯 글자 'K.O.R.E.A'는 언제 봐도 가슴 벅차고 자랑스럽다.


가끔은 대기업에 다니는 남의 자식들보다 훨씬 주목받는 타이틀이 되어주기도 해서 "내 딸은 국가대표다"라고 말하는 순간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식사 분위기가 무르익고 취기가 오르면서 가볍게 웃고 떠들던 이야기들이 점점 진지한 대화로 이어졌다.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선수들과 정이 많이 쌓여 피지컬 트레이닝만이 아니라 서로의 고민도 나눌 수 있는 돈독한 관계가 되었다고 했다.

축구나 배구 등과 같이 유명한 스타 선수들이 속해 있는 인기 종목이나 금메달이 기대되는 양궁 같은 종목에 비해, 아이가 담당하고 있는 종목은 비인기종목이라서 선수들의 고민도 더 많은 듯 했다.

경기력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선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응원을 보내주지만 큰 대회를 앞두고 있어 선수들이 많이 예민해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올 때마다 마치 우리나라의 체육계를 혼자서 책임지고 있는 양 목에 힘을 주고 무용담을 늘어놓던 아이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단에게 지급되는 단복이 트레이너에게는 지급되지 않아 결단식에 참석을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팀의 일원으로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기대했던 순간에 소외되어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일해 왔는데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지도자나 선수,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씁쓸했다고 털어놓았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몸 상태에 맞춰 트레이닝을 하고, 부상당한 선수들의 재활을 도와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어 가는 것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낀다며 그동안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던 아이라서 이번 일로 느꼈을 실망감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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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그을린 아이의 손등 ⓒ 심정화

 
아이는 앞으로 더 성공해야겠다고 느꼈다지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르다. 세상에는 주인공과 조연이 따로 없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하는 일에 따라서 조금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일해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성공의 기준을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두지말고 자신이 스스로 인정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것에 두기를 바란다. 자신의 일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아시안게임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각 방송사에서는 경쟁적으로 종목마다 유명 스타선수들을 해설위원으로 기용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벌이고 있다.

주로 메달이 기대되는 인기 종목들 위주로 방송이 되고 관심이 쏠리겠지만,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 내내 선수촌에서 똑같이 땀 흘리며 고생한 다른 많은 비인기종목 선수들에게도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기를 바란다. 그들도 모두 쏟은 땀과 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주인공들이니까.
   
딸아이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더니 불도 끄지 않은 채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자신의 침대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또다시 선수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곤히 잠든 아이의 빨갛게 익은 얼굴과 구리빛으로 그을린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국가대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 #아시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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