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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점에서 세탁소로… 50년 한 자리

유진컴퓨터세탁 한광학씨, 양복점 30년에 20년 세탁업

등록 2023.09.19 08:37수정 2023.09.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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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양복점’ 30년, ‘유진컴퓨터세탁’ 20년, 1974년에 첫 가게문을 연 한광학씨가 5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 <무한정보> 황동환


오래 전 추억을 떠올리며 찾아간 가게가 흔적조차 사라진 경우가 있다. 낡고 오래된 기존 건물을 허물고 들어선 낯선 새 건물에 내외부를 리모델링해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가게를 이전했거나 아예 문을 닫은 경우다.


또는 건물과 가게는 그대로이지만 주인이 바뀐 경우도 있고, 같은 주인이지만 업종을 바꾸면서 이전의 모습과 달라져 명맥이 끊기기도 한다.

예산해봄센터 길 건너편 오래된 1층짜리 건물엔 반세기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포가 있다. 중간에 업종이 바뀌긴 했지만 가게도 주인도 그대로다. 

지난 2003년 세탁업으로 업종 변경 뒤 20년 동안 '유진컴퓨터세탁'를 운영하고 있는 한광학(81)씨의 가게는 30년 양복점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양복 장인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옷 수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탁소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옷 세탁과 다림질로 보낼 시간을 벌 수 있는 요긴한 곳이다. 옷 수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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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학씨 ⓒ <무한정보> 황동환

 
수선할 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찾아간 세탁소. 그곳 주인이 실은 경력 30년 이상된 양복 재단사라면 어떤 마음일까.

"아마도 나처럼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면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다. 전문 양복 기술을 보고 수선을 맡기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며 "지금처럼 기성복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오랫동안 양복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30년 전부터 기성복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양복점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며 어렵게 일군 양복점을 접고 세탁소로 전환한 이유를 설명했다.


비록 하던 일은 달라졌지만 양복 재단에 익숙한 그의 손놀림은 옷 수선을 맡긴 고객들에게 만족감을 전한다. 15~20년 된 단골들이 최첨단 기계들로 장착한 세탁소를 마다하고 허름해 보이는 '유진컴퓨터세탁'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다.

그는 양복재단 기술을 정규학교나 학원이 아닌 기존 양복점에 직원으로 일하면서 배웠다. 예산읍 산성리가 고향인 그가 처음 양복 재단 일을 접한 곳이 본정통에 있던 '보신양복점'이다. 그곳에서 그에게 기술을 전수한 분들의 이름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최인환, 유인복, 그분들 다 돌아가셨지…. 18살 때, 어려서 직원으로 들어가 심부름해가면서 양복재단 기술을 배웠는데, 모든 일이 다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심부름을 잘못하면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얻어 터져가며 배웠다"며 "처음엔 바늘 잡는 법부터 배운다. 다리미 숯불도 피우고, 이것저것 시키는 일 하면서, 어깨너머로 재봉기술을 배웠다. 눈썰미 좋은 친구들은 금방 배우고, 눈썰미 나쁘면 오래 가고 그랬다. 그렇게 한 1년 정도 되면 일거리가 주어지던 시절이다"라고 회상한다.

예산에서만 양복 기술을 터득한 건 아니다.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을지 양복점'으로 기억하는 곳에서도 직원으로 일하며 기술을 터득했다. 이런 과정은 그의 군 복무(1961~1965년) 뒤에서 한동안 지속되다가, 마침내 50년 전인 1974년 독립해 '취미 양복점'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개업한 곳이 지금의 '유진컴퓨터세탁' 자리다.

"남의 집 살이하다 독립했을 때, 정말 뿌듯했다"며 당시 기뻤던 순간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 무심하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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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수선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재봉틀(왼쪽), 오버로크 기계 역시 양복점을 운영할 때부터 한광학씨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다(오른쪽). 세탁소로 바뀐지 20년, 이 곳이 한 때 양복점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 <무한정보> 황동환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지만, 끈기와 노력, 열정으로 양복재단사의 꿈을 이룬 그는 독립 한 뒤 가정을 꾸리고 1남 2녀의 자녀들을 키웠다. 그의 손끝에서 이룬 역사이고 자부심이다.

당시 양복 한 벌 값은 얼마고, 주로 어떤 사람들이 양복점을 찾았을까. 그는 "양복 한 벌 값이 보통 2000~3000원 했고, 조금 비싸면 5000원 하던 시절이다. 그때만 해도 5000원도 큰 돈이었는데,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웬만하면 양복을 해 입었다"며 "대부분 결혼예복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 직장에 취직해 정장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고 전한다.

그에게 양복재단을 배워 독립한 후배들도 여럿이다. 

"양복 한 벌 만드는데 꼬박 2~3일이 걸린다. 치수를 재고, 재단하는 일이 시작인데 이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한창 양복점이 잘 될 땐 직원도 뒀는데, 말썽도 많이 폈지…"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면서 "내 밑에서 양복 기술 배워 서울에서 괜찮게들 살고 있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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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점 개업과 함께 한광학씨의 손을 떠나지 않은 가위와 스테인리스 골무, 누군가는 이 가위로 재단한 양복을 입고 결혼을 했고, 또 누군가는 취직시험에 붙었다. 무엇보다 1남 2녀의 자녀를 키웠다. ⓒ <무한정보> 황동환

 
세탁소 안에는 여전히 양복점의 기운이 곳곳에 스며 있다. '취미양복점' 운영 당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50년 동안 한씨의 손때가 묻은 채 가게 곳곳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리미판 구석에 있는 가위는 양복점 할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다리미도 그때 사용하던 것이냐"라고 묻자 "이건 수시로 바꿔야 줘야 한다"며 직접 주문 제작했다는 반지 모양의 스테인리스 골무를 꺼내 보인다. "양복점 할 때 개당 50원 주고 7~8개 맞춘 건데, 직원들 하나씩 다 나눠주고 한 개 남았다"고 한다.

얼핏 봐도 연식이 느껴지는, '쓸기담'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약통은 단추 등의 재료를 담는 용도로 수십 년째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업대 옆에 위치한 '브라더미싱'도, 옷걸이에 빼곡이 걸려 있는 세탁물 안쪽에 있는 '오버로크' 기계도 그가 양복점을 할 때부터 그의 손을 타던 도구들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가위요 골무겠지만, 그가 그 도구들을 버리지 않는 까닭을 그저 익숙함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 예산군에서 사라진 건물들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시선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전해온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세탁소 #양복점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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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참소리 <무한정보신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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