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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가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엉뚱한 '답변서'

[주장] 납북귀환어부 문제를 '납치문제'로 축소 정의... 북한 못지않게 정부 책임 큰데, 쏙 빠져

등록 2023.09.21 14:47수정 2023.09.2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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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 제출한 한국정부의 의견서의 일부를 번역한 내용. ⓒ 변상철

 
지난 9월 11일부터 10월 13일까지 스위스 제네바 유엔 사무국에서 제54차 인권이사회가 열린다. 이 이사회에서 파비안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이하 진실정의특보)은 총 10개의 의제 중 3번(모든 인권,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보호 및 증진) 이하의 '한국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보고 내용은 지난해 6월 10일 납북귀환어부피해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직접 피해사실을 경청한 파비안 살비올리 진실정의특보가 한국정부에 권고한 내용과 동일하다. 이 보고서에서 파비안 진실정의특보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배상이나 명예회복 조치가 미흡하"다면서 "진실규명을 위한 정부기록의 접근, 재심을 위한 정부의 노력,  배·보상과 관련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올해 8월 말 한국정부가 유엔에 제출한 답변서에는 그야말로 엉뚱한 내용만 담겼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정부는 '7. 북한에서 납치 및 귀환한 어부들'에 대해 "북한 납치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남북대화가 재개되면 이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라며 "남북대화가 중단된 현 상황에서도 다양한 노력을 통해 북한이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도록 계속 촉구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답변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한국정부는 서두에서 납북귀환어부 문제를 '납치문제'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를 슬그머니 뺀 설명이다. 1기 진화위, 국정원 발전위원회 등 각종 과거사위원회에서 밝힌 납북귀환어부는 3600여명이 넘는다. 이 중 돌아오지 못한 어부는 채 40여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정부는 납북귀환어부와 납북미귀환어부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미귀환어부에 대한 설명만을 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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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치안보부에서 작성한 납북귀환어부 현황. ⓒ 변상철


한국 정부가 밝혔듯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는 40여명의 '미귀환' 어부뿐만 아니라 3600여명의 귀환어부들에 대해서도 있다. 그러니 이 답변서는 처음부터 잘못된 정의와 인식으로 출발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어서 '납북귀환어부'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적 근거를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사정전에 관헌 협정 체결에 따른 납북자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한 납북자 보상법)이다.

정부는 이 법에 근거해 '북한에 3년 이상 납북되었다가 북한으로 송환된 납북자에게는 정착금과 주거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납북자의 가족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이 부분 또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이 법은 3600여명의 납북귀환어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법인데, 마치 '납북귀환어부'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기본적으로 북한에서 거주하게 된 '납북자'를 지원하는 법이다. 물론 이 법에도 '귀환납북자'를 지원한다고 돼 있지만,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 및 제7조부터 제9조'까지를 위반한 사람은 지원에서 제외하고 있다.

대부분의 납북귀환어부들은 납북되었다가 귀환된 후 수사당국의 수사를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납북귀환어부는 위 법률을 통해 지원받기 어렵단 이야기다. 그럼에도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지원법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원대상에서 제외되는 법률을 들어 지원하고 있는 듯 설명하고 있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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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납북자법에 따르면 납북귀환어부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 변상철

 
더 큰 문제는 '공식사과'라는 답변란에 담긴 내용이다.

한국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공식사과에 대해 '아직까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서술은 해당 사안을 반쪽만 보고 정리한 것이다. 납북귀환어부 문제는 북한의 책임뿐만 아니라 한국정부의 책임 또한 그에 못지않게 크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자국민이 북한에 납치되는 상황을 막지 못한 큰 책임이 있다. 그리고 장기간 억류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을 불법 연행해 여인숙, 여관, 공공기관 시설 등에 집단 구금하며, 고문 등을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조작하여 감옥에 보낸 뒤, 다시 어민과 그 가족들을 수년에서 수십년간 사찰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사회로의 진출을 막는 등 막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러한 책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납북귀환어부에 대해 북한의 책임과 사과만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 어찌 엉뚱한 답변이 아닐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정부는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반인도적, 반인권적 고문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조작된 범죄사실을 기소했던 수사관, 검사 등을 기소하거나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도 '납치를 자행한 주체가 북한 당국이기 때문에 가해자를 특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미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납북귀환어부들을 감금, 고문하고 조작된 내용으로 기소한 책임기관을 명시하고 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정부의 조치 등에 대한 권고를 결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납치'로 문제를 국한해, 한국으로 귀환한 3600여명의 어부들에게 가해진 한국정부의 반인도적, 반인권적 문제를 특정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의지는 감추었다.

한국정부의 이러한 답변은 피해자들에게 지속된 고통과 반복된 실망만을 안겨줄 뿐이다. 진실화해위윈회에서는 피해자들에게 명예회복을 이야기하면서도 같은 정부기관에서는 피해자들의 피해사실에 대해 감추거나 왜곡된 입장을 내보인다면, 어느 피해자가 정부의 태도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번 정부의 의견서는 매우 부적절하며, 국제사회에 한국정부를 신뢰하지 못할 반민주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의견서이다. 지금이라도 한국정부는 납북귀환어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국제인권기준에 따라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소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 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 #FIGHTING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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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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