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구석구석에서 만난 삶의 이야기들

나는 늙을 줄 몰랐던 철부지였다

등록 2023.09.23 14:24수정 2023.09.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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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삶은 고요하다


가을이 성큼 찾아온 골짜기의 한낮 기온은 아직도 따끈하다. 새벽닭이 아침을 여는 산말랭이엔 안개가 가득이다. 어디가 산이고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골짜기의 하루가 열린 것이다. 오가는 사람도 드물고 오로지 옹알거리는 도랑물이 주인이며, 가끔 울어주는 이웃집 닭이 소리를 섞는다. 지난해에 벌목 한 앞산에는 맑은 이슬이 반짝이며 여기가 천상의 화원임을 알려준다. 

가까스로 자리 잡은 작은 자작나무가 어린 잎새를 흔들고 있다. 벌목을 하고 심은 아기 자낙나무 잎이 앞을 보여줬다 뒷면을 보여주고, 다시 박자와 리듬 없이 흔들거림은 눈을 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해발 300m 정도의 골짜기에 연신 찾아오는 안개는 농촌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곳곳에 고랭지 배추밭이 들어섰고, 절임배추라는 시대의 새 선물이 골짜기 삶을 살찌게 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집 뒤 소로를 지나는 경운기 소리가 들린다. 여든 훨씬 넘으신 동네 어르신이 비탈 고추밭엘 가는 소리이다. 

시골주택이 자리 잡은 골짜기는 한없이 조용하다. 길가를 차지한 강아지풀이 이슬을 이고 있고, 길가엔 백일홍도 가득 피었다. 잔잔한 채송화가 빨강으로 물들였고, 가을을 재촉하듯 빨강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일렁인다. 도랑을 따라 자란 고마니풀이 빨간 꽃을 피우며 하늘 속 고추잠자리와 어우러지는 초가을, 가끔 택배차량만이 덜컹대는 골짜기의 풍경은 한없이 고요하다. 위대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골짜기의 삶은 아침 운동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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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밤이 풍경 살아가는 골짜기 밤의 풍경, 고요한 초저녁에 달이 찾아오고 있다. 고요함과 한적함을 전해주는 골짜기 풍경은 평화스럽기만 하다. ⓒ 박희종

 
체육관은 동네 사랑방

일주일에 서너 번 찾아가는 체육관은 한 달에 사용료 만원, 200여 명의 주민들이 찾는 대단한 체육관이다. 갖가지 운동기구가 비치되어 있고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체육관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젊은이들과 어울려 운동을 한다. 동네의 모든 이야기가 오가는 현장이다. 앞집에 누가 살고 뒷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사는 동네다.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곳곳에도 삶의 이야기가 많다.


아침마다 체육관 주변을 청소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운동을 하고 나오면서 인사를 드리지만, 어르신이 청소하는 곳에 무상으로 운동하는 것 같아 늘 죄송스럽다. 죄송한 마음에 인사만 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것은 어르신을 두고 할 일이 아닌 듯해서다.

어느 날 운동을 하고 나오다 정면으로 마주했다.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묻자 할아버지는 자세를 바꾸셨다. 청소하던 빗자루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신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이야기는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였다.

대장암 수술로 자식들한테 못할 짓을 했다면서 후회 아닌 후회를 하신다. 지금은 건강해 청소도 하며 용돈을 벌어간다는 할아버지는 1937년 생이라 하셨다. 묻지도 않은 생일까지 알려주신 여든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아들 덕분에 병도 고치고 청소도 하면서 소일하신다는 어르신은 아들 자랑을 시작하셨다. 약속 시간 때문에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떠나온 것이 너무나 죄송했던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다. 더 들어줘야 했었는데, 가끔 후회스러운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가을 들판에도 삶의 이야기가 있다

아침에 내려온 신선함이 좋아 제방을 달리는 자전거길, 한치의 땅도 놀림이 없는 시골 노부부가 아침부터 늙은 호박을 수확하고 있다. 아직 덜 익은 것이 아니냐는 말에 얼른 수확을 해야 한단다. 익기도 했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손을 댄단다. 왜 따가느냐는 말엔 저절로 자란 것이 아니냐는 능청에 할 말을 잊었단다.

노부부는 그럴 수 있느냐며 할 말이 많은 듯이 농사짓는 이야기에 사는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눈치껏 이야기를 주고받고 자리를 떠 자전거길을 쉬기 위해 동네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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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가는 가을 가을 들판엔 가을이 넘실댄다. 벼가 익어가고, 수수가 영글며 출렁이는 들판은 마음까지 풍성하다. 자연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하루하루가 소중하고도 감사한 골짜기다. ⓒ 박희종


모자에 지팡이를 든 동네 어르신이 양동이를 들고 지나가신다. 인사를 하자 반갑게 다가와 옆에 자리를 잡으신다. 양동이에는 계절의 선물인 버섯이 들어 있다. 어떤 버섯이냐는 말에 산에서 금방 채취한 것이란다.

어르신의 이야기가 들판에서 시작되었다. 지난해는 양동이에 가득했을 버섯이 이것밖에 없다며 서운해하신다. 버섯이 적은 것도 기후 탓이란다. 기후 변화는 인간의 무모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며, 그나마 시골에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말씀이다. 

어르신은 100세 시대 이야기로 이어진다. 백세시대를 말하지만 모두가 거짓말이란다. 말로만 백세 시대이지 100살까지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말씀이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지 목숨만 부지하면 뭐 하냐는 말씀이다. 100세가 넘으신 김형석 교수님의 이야기로부터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로 이어진다. 100세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아흔까지만 건강해도 최고의 삶이라는 어르신, 벼 한 포기가 만들어내는 산소의 양이 엄청 많으니 어르신은 신선한 산소통 속에 사는 것이란다.  

난, 늙을 줄 몰랐던 철부지였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골짜기로 들어오는 길, 귀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온다. 먼 밭에서 일을 하시는 어르신, 지난봄에 소주잔을 건네주시던 어르신이다. 봄철 골짜기의 선물인 나물을 뜯으러 산엘 올랐었다. 

초보 나물꾼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까 하여 올랐지만, 산바람만 쐬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자그마한 비탈밭 가장자리에 경운기가 서 있고, 어르신이 고추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자 얼른 오라는 손짓을 하며 소주 한 잔 하고 가란다. 얼떨결에 풀숲에 앉자 마시다 남은 소주병을 꺼내신다. 얼른 소주 한 잔을 건네시며 삶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르신과 서너 잔을 주고받으며 한 나절을 보내고 내려왔다. 아직도 잔을 건네주신 어르신은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에 전념하신다. 일하는 것이 소일거리인 듯이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경운기 소리는 어르신의 건강함을 알려주는 소중한 소리다. 

지나는 사람에게 소줏잔을 건네시고, 청소하던 할아버지는 발길을 잡고 계셨다. 자전거길에 만난 어르신은 삶의 이야기가 끝이 없다. 잃어버린 호박보단 말을 하고 싶은데, 누구하고 말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는 낯선 길손의 눈치에 얼른 말을 멈추신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줏잔을 건네드려야 하는 어르신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핏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고희를 넘어가고 있는 늙을 줄 몰랐던 철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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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함께하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만난 삶의 흔적들이다. 곳곳에서 만난 늙음의 삶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늘 외로움도 함께하고 있다.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사람이 없는 그들의 삶, 모두가 만나야 하는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 박희종

 
덧붙이는 글 오마이 뉴스에 처음으로 게재하는 삶의 이야기다.
#삶 #가을 #외로움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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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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