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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는 아니지만 쌍둥이가 된 아이들 이야기

입양 할 결심과 떠나보낸 아들, 이후 탄생한 가족... 송창권 제주도의원의 사연

등록 2023.10.18 11:10수정 2023.10.1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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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11년 전, 17살 고등학생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아비에게는 흐른 세월조차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거기에서 시작돼야 할 주제였다.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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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권 제주도의원 ⓒ 김지영

 
"오래 반대했던 입양을 아들이 허락한 때가 그해 8월이었어요. 사고는 한 달 뒤인 9월에 일어났지요. 천국 가기 전에 아들이 마지막 남긴 유언이 됐어요."

제주특별자치도 재선 도의원(외도동, 이호동, 도두동 선거구)인 송창권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1994년 당시에는 다소 늦은 서른 한 살 나이에 결혼해 그 다음다음 해 1월에 낳은 아들이었다. 원인불명의 심정지가 왔고 한 달을 중환자실에서 버티다 떠난 아들이었다. 두 살 터울인 딸은 오빠의 죽음을 한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송 의원은 도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요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입양 할 결심

그가 입양 이야기를 꺼낸 건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다. 

"다른 가정에 가지 못하는 애들을 우리 가정에 데려와 잘 키워서 사회에 나가 당당하게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일반 입양도 아니고 장애 입양을 결심했던 이유였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 아내 집안처럼 조부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었던 가정 환경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장애입양은 구체는 없으나 실체로 스며든 자연스러운 결심이었다. 


"아내도 나중에는 동의를 해줬는데 아이들이 동의를 안 해줬죠." 

매년 국내입양되는 장애 아동 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희귀 사례인 우리 사회 현실이다. 그의 결심을 막아선 건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장애입양을 하면 양육이 전적으로 자기몫임을 알면서도 하겠다고 나선 그의 아내였다. 

"제 아내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결혼 할 때가 제가 행정고시에 실패하고 낙향한 때였습니다. 그런 저하고 결혼해줬습니다. 평생을 사서로 일하면서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우리 아들하고 딸이 중학생 초등학생 때 제가 입양이야기를 꺼냈는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고 당시 결론은 장애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었죠. 아이들에게는 동생이 생기는 일인데 그걸 반대하는 아이들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기다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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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준이와 예루. ⓒ 송창권 제공

 
몇 년 후 아이들이 그에게 장애가 아닌 입양은 괜찮다는 신호를 줬을 때, 그는 사회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아이가 우리 가정에 왔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장애시설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형제로 자라야 할 아이들의 동의가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일을 진척하는 건 어려웠다. 그는 계속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른다. 아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족들이 매년 함께 다니던 소록도 봉사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아들에게는 그 해가 마지막 소록도 행이었다. 

대통령선거가 있어 그가 빠진 채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간 소록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혹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장애입양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아들을 떠나 보내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이 있었다. 아들에게 온 원인불명의 심정지. 공부도 잘했고 수영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소질이 많았던 아들이었다. 

부모를 잃은 자식, 배우자를 잃은 이처럼 가족 내에 사별한 상대방에게 붙이는 호칭은 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는 마땅한 호칭조차 없다. 그만큼 자식을 잃은 고통과 슬픔의 크기와 깊이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다. 

헤아리기 어려운 심정을 묻어둔 채 그들은 아들이 어렵게 동의해 준 입양을 유언으로 받아들였고, 몇 달 뒤 입양을 진행했다. 다만, 남은 딸을 위해 장애입양이 아닌 보통 입양을 선택했다. 2013년 그 일이 있은 다음해 1월이었다. 

넉 달이란 기간은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이 아직 뼛속까지 남아 있을 때였는지 입양 상담을 위해 찾아간 시설에서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와 아내는 예의 차릴 새도 없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보는 순간 아들 생각이 나면서 미친 사람처럼 울게됐어요."

시기상조였다. 아직은 잃은 아들에 대한 슬픔을 더 깊이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시설에서도 퇴짜를 맞은 건 당연했다. 1년 후 그와 아내는 제주가 아닌 육지에서의 입양을 다시 시작했다. 사전 상담을 통해 입양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고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아이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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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 송창권 제공

   
두 아이가 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난 어느날 아이를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와서 보겠느냐고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볼 것 없이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말로 답했다. 혈액형도 생김새도 유전적 배경도 보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아이는 보여주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그냥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 주신 그 애가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었어요. 우리가 아이를 낳아도 골라서 낳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른 아이를 볼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10개월 된 남자 아이였다. 남은 입양절차를 마치면 그의 자식으로 이름을 올릴 그의 아이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방문하기 전 약속과 달리 선생님 한 분이 비슷한 또래의 남자 아이 하나를 안고 왔다. 시설에서 둘이 워낙 서로 잘 지내는 사이인데 친구가 안 보인다고 보채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고 했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불쾌했지만 다시 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뒤에 온 그 녀석이 아내를 보더니 두 손을 번쩍 들면서 안아달라고 했다. 아내는 그런 아이를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했다. 제주에 돌아와서 고민이 깊어졌다. 

아내는 그에게 둘 다 입양하자고 했다. 느닷없는 제안에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내 역시 안았던 아이의 온도를 잊지 못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목사님이 그를 불렀다. 

"아이를 낳는 건 여자니까 권사님 말씀을 좀 들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둘을 받아들이라는 얘기였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요양원 원장에 공무원인 아내와 딸 자식 하나 있는 넉넉한 집안에 제주 토박이로 안정적인 가정이라 둘 도 넉넉할 것이라는 입양기관 소장님의 계산이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곳 임시시설에서는 아이들이 1년이 지나면 보육시설로 전원돼 입양 기회조차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아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소장님의 '계획된 약속 위반'이었다. 남자 아이는 건강해도 입양이 어려운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입양현실이기도 했다.

둘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엄마에게서 태어났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쌍둥이처럼 지낸 인연이었다. 

쌍둥이가 되다

아내의 결정에 순종하면서 입양재판을 시작했을 때 판사님께 탄원서를 썼다. 둘은 쌍둥이가 아니지만 쌍둥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둘 중 하나는 생년월일이 분명하나 다른 하나는 태생정보가 전혀 없는 아이여서 크게 진실을 가리는 일도 아니었다. 

판사님의 넉넉한 허락 속에 그와 그의 아내는 쌍둥이를 슬하에 두게 됐다. 그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예준이와 예루. 10년이 지난 지금 처음 만나 아이 삼기로 한 아이가 누구이고,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선생님이 안고 온 아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아내에게 두 손 번쩍 들며 와락 안겨서는 아내에게 깊은 고민을 남겼던 10개월 된 아이가 사실은 아무한테나 두 손 번쩍 들고 와락 안겨드는 아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예준이와 예루는 그와 그의 아내에게 와서 자식이 되어 준, 똑같이 고맙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자식을 10년 키워 본 부모들이 가지는 마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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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 명절 때 찍은 가족사진 ⓒ 송창권 제공

 
공개입양으로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의 입양 사실을 잘 안다. 그 사실은 그저 그들이 가족이 된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오빠를 잃고 오래 상심했던 딸 아이가 올해 스물여섯 취업준비생이다. 지금은 덤덤하게 오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두 동생과 나누는 사랑의 힘이 컸다. 

평생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한다. 한 번 자식은 살거나 죽거나 부모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자식으로 남는다. 입양으로 얻은 두 아들이 죽은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지 않았다. 못한게 아니다. 그 아들은 영원히 그 아들로 남을테고 두 아들은 두 아들대로 그들에게 다 같은 자식으로 남아 있을테다. 

가족은 힘이 세다. 
덧붙이는 글 송창권 의원 인터뷰는 지난 7월 27일 제주도의회 의원 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입양 #공개입양 #송창권의원 #제주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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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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