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 단풍과 함께 김시습을 기리다

등록 2023.10.19 11:27수정 2023.10.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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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철이 다가왔다. 언론사마다 눈길 끄는 제목으로 단풍명소를 소개하기 바쁜데, 산도 많고 절도 많은 이 땅에는 어딜가나 아름다운 단풍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는 우리집 가까이에 있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 주변의 단풍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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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 단풍은 아직 이른듯 하다 ⓒ 윤재홍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무량사 가까이에 있었다. 6년 동안 거의 매년 봄소풍 무량사, 가을소풍 무량사였다. 그때는 단풍이 좋은 줄도 몰랐고 무량사가 이러 저러한 곳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제 나도 단풍의 나이가 되어 고향에 와 보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폐교 되었고, 그때는 허름하던 무량사 주변은 오히려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나마 이 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극락전과 오층석탑은 눈에 익은대로여서 옛 기억의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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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한당 - 맑은 마음으로 한가하게 쉬는 곳 ⓒ 윤재홍

 
극락전 뒤로 돌아 5분 정도 걸으면 '청한당'(淸閒堂)이 있다. '맑은 마음으로 한가하게 쉬는 집' 정도로 해석 되는 당호인데 '청한자'로 불리던 김시습을 기리는 휴식공간이다. 지치고 힘든 삶을 살아온 김시습의 소망이 투영된 듯하다.

사람만 쉬는 게 아니라 청한당 편액의 가운데 글자인 한가할 '한(閒)'자도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걸 보니 여기서는 방랑자 김시습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뒹굴며 쉬라는 뜻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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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한당 편액 - 가운데 글자인 한가할 '한(閒)' 자가 뒤집어져 있다 ⓒ 윤재홍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세 살에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소학을 뗀 신동이라고 한다. 다섯 살 때 세종대왕이 내린 시제로 지은 시를 본 대왕께서 '앞으로 크게 쓰리라'고 하셨다니 다섯 살에 이미 과거시험에 합격해 놓은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때를 기다리며 북한산에서 공부하던 그가 21세 되던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불의한 세상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와 세조에 저항하다 죽은 사육신들을 노량진의 작은 언덕에 묻어준 후 광인처럼 방랑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무량사에 와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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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영정 - 보물 제1497호 ⓒ 윤재홍

 
청한당과 극락전 사이에 있는 영정각에는 김시습의 영정(보물 제1497호)이 모셔져 있다. 오래된 초상화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색이 많이 바랬는데, 퇴색된 초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의 무게가 느껴지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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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부도 ⓒ 윤재홍


나는 무량사에 갈 때마다 부도밭에 간다.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묘)가 있기 때문이다. 일주문 들어서기 전 왼편에 무진암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에 부도밭이 있다.

이 부도밭에 있는 여러 부도 중의 하나에 '오세 김시습의 묘(五世金時習之墓)'라고 표시되어 있다. 광인처럼 살았던 그의 삶과는 달리 부도는 잘 정돈되어 있다. 남은자들의 죄의식 때문일까? 화사한 연꽃무늬 받침대와 활짝핀 옥개석이 소박한 탑신을 보완하고 있는 그의 부도는 안정적이면서도 매우 경쾌한 모습이다.


그런데, 옥의 티라고 할까? 최근에 무량사는 김시습 부도로 부터 직선거리 200m 정도에 김시습 부도 모조품을 세웠다. 모조품 부도는 원래의 부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원래의 부도 보다 더 눈에 띄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이제 여기 오는 사람들은 이 모조품 부도를 보고 이게 김시습 부도라고 착각할까 우려된다.

의로운 천재 김시습은 살아서도 편히 쉬지 못했는데, 500년 이상 편히 잠들어 있던 무덤(부도) 마저도 이렇게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일까?
#부여 #무량사 #김시습 #매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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