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김장철 풍경... 그 시절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김장철을 맞이하는 시골 모습, 이렇게 변해가네요

등록 2023.11.03 14:16수정 2023.11.0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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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햇살이 내려오는 날,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엔 천막이 하나 둘 세워졌다. 계절 따라 삶의 모습이 변하고 있으니 봄부터 돌봐왔던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시절 소중한 간식이었던 옥수수가 농가의 큰 삶의 수단이 되어 도로 곳곳에서 옥수수를 팔기 위함이니, 지나는 차량이 멈춰 섰고 아주머니는 땀을 흘리며 옥수수를 익혀내고 있었다. 서서히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팔아 내는 품목이 달라졌고, 길가에 붙는 현수막 문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늙은 호박이 등장하고, 노란 고갱이 배추와 무가 등장했으며 뒤로는 새로운 현수막이 내 걸린 것이다. 여기에 '절임배추'를 판다는, 생전 처음보는 현수막이 들어섰다. 절임배추라니?

그 말에 오래전 어머님이 배추를 뽑아 소금에 절여 김장을 하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절임배추란 김장철이 돌아오면서, 김장을 쉽게 담글 수 있도록 배추를 적당히 절여 파는 것이었다. 농가의 큰 소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 풍경이다. 봄부터 여름배추를 길러낸 비탈밭엔 김장배추가 심어졌다.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비탈밭이 사람들로 가득했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서서 물을 주고, 긴 장치를 이용해 배추를 심었다. 긴 비탈밭이 순식간에 점 푸름으로 변했고, 서서히 여름이 지나면서 줄 푸름으로 자리를 잡았었다. 기어이 서늘함이 느껴지는 가을날의 비탈밭은 짙은 녹색으로 물이 들었다. 해발이 300m 정도 되는 높다란 동네는 고랭지 배추가 적당한 곳이다. 

시골동네는 김장철이 가을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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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밭엔 배추가 가득하다. 여름을 이겨낸 들녘엔 가을이 가득이다. 비탈밭엔 가을 배추가 고갱이를 안고 몸집을 불렸고, 어김없이 찾아 온 김장철에 골짜기는 벌써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푸르른 배추가 농부의 마음을 알아내고 벌써 몸을 불려 놓았기 때문이다. ⓒ 박희종



여름이 서서히 저물 무렵 작은 텃밭에 김장배추를 심었다. 덩달아 무도 심어야 김장을 하고 깍두기라도 담을 수 있다. 간간이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며 노란 새싹은 대지를 밀어냈고, 어린 배추는 바람 따라 이파리를 나풀거렸다. 연초록 잎이 커지기도 전에 오지랖 넓은 암탉이 병아리를 끌고 텃밭으로 나섰다. 먹음직스러운 배춧잎을 놔둘 리 없었으니 인간은 기어이 울타리를 쳐야 맘이 놓였다. 그 시절 어머님이 계절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가뭄이 오면 물을 줘야 했고, 장마철이면 물길을 내야만 했다. 기어이 계절이 바뀌어 늦가을이 되면 동네엔 한바탕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이웃집과 어울려 김장을 하고 아랫집 김장도 도와줘야 해서다. 텃밭에서 뽑은 배추를 갈라 커다란 다라에 절여 놓았다. 지난가을 장만해 두었던 간수 빠진 소금을 이용해야 김장맛이 좋다. 여기에 젓갈도 빠질 수 없으니 겨울양식인 김장 준비가 끝이 났다. 먹음직한 돼지 수육이 빠질 수 없으니 양지바른 곳에 온갖 식구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다. 


널따란 툇마루에 앉아 소주잔이 오가는 즐거움에 김장을 하는 듯했다. 그 때는 온 가족이 모인 즐거움 속에 김장이 마무리되면, 뒤꼍 큼직한 웅덩이엔 겨우내 먹을 김칫독을 묻었다. 깊숙이 묻은 김칫독에 두툼한 볏짚으로 마무리했다. 혹독한 추위를 막을 움막이 설치되고 간이 문을 만들어야 김장이 끝나는 것이었다. 겨우내 양식이었던 김장김치, 새봄에 맛보던 그 김장김치 맛을 다시 맛볼 순 없을까? 얼음이 숭숭 얼어붙은 김장김치의 맛은 추억 속에서만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들 

원래는 농부들은 김장배추를 심어 가을을 준비했다. 기어이 알찬 배추로 길러내 소중한 목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 등록금에 하숙비를 줘야 하고, 큰 딸 결혼식도 치러내야 하지만 해마다 반복되던 배추농사는 늘 허전했다. 어쩌다 배추가 실하게 되면 중간상인들의 차지가 됐고, 지지부진한 배추 농사는 늘 가슴에 멍을 남겨주곤 했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부들의 환경도 변하고 있었다. 

배추를 밭뙈기로 중간상인에게 넘기던 시절은 지나갔고, 온 동네가 합심하여 절임배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거대한 창고를 짓고, 온 밭을 뒤덮을 정도의 큰 비닐하우스에 절임배추 공장을 세웠다. 집집마다 배추를 수확하기가 바쁜 계절이 돌아와 골짜기에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에 김장배추를 팔며 절임배추를 주문받기 위한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현장에서 직접 김치를 담아 팔아 내는 풍경이 새롭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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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알려주는 사연들 계절따라 만나는 도로변의 모습이 다르다. 골짜기의 삶에 따라 곳곳에서 만나는 현수막은 계절의 순환과 변화하는 삶의 모습을 알려 준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면서 변해가는 세월을 알려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박희종

 
자그마한 시골에 김장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기어이 시작한 김장축제, 맛깔난 점심도 제공하고 적당한 막걸리도 따라준다. 널따란 마당엔 김장을 즉석에서 담아 팔기도 하고, 절임배추를 주문받기도 하는 골짜기의 축제 현장이다.

넉넉한 살림이면 그럴듯한 가수도 초빙하지만, 그렇지 못한 시골에 동네에선 유지들이 모였다. 각자가 한 해동안 쌓아온 삶을 자랑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어르신들의 연설이 시작된다. 그만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르신들이 모이니 곳곳이 시끄럽다. 한참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고서야 서서히 김장축제는 저물어간다. 고단했던 여름날을 추억하며 한 잔의 소주잔으로 시름을 덜어냈다.

어머니를 그리며 모인 가족들 

골짜기의 양지바른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김장을 하기 위해 대처로 나간 자식들이 다시 모인 것이다. 여기는 오래전 부모님이 남기고 간 시골집,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보물 같은 보금자리다.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와 만난 가족들이 반가우면서도, 여기에 어머니라도 살아계시면 더없이 좋았을 잔치가 아쉽기만 하다. 어머니의 세월을 되새기며 다같이 즐겁게 김장을 했다. 기나긴 옛이야기 속에 김장이 마무리되면, 정이라곤 붙을 곳이 없는 네모 반듯한 고무통에 김장을 나누어 차에 싣는다. 큰 누님의 지휘아래 공평하게 나누어 싣고 정든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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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의 계절 가을에 만나는 김장철, 곳곳에서 변해가는 김장철의 모습을 본다. 삶의 모습이 변하듯 김장을 담그는 모습도 변해가지만, 그래도 김장의 본연의 맛은 언제나 그리움과 추억을 주고 있다. ⓒ 박희종


올해도 어김없이 한 겨울 식탁을 책임지어 줄 김장철이 돌아왔다. 온 가족이 모여 떠들썩하던 풍경은 사라지고, 절임배추라는 시대의 절묘한 상품이 나타났다. 곳곳에서 주문을 받아 순식간에 집 앞까지 전해진다.

이제 어렵지 않게 김장을 담을 수 있기도 하지만, 직접 하기보다는 다들 적당한 양을 제때마다 구입해 먹는 세월로 변하고 있다. 저녁에 주문하면 아침 문 앞에 놓여 있는 세월, 온 가족이 모여 버무리던 세월은 변해가고 있다.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온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김장 풍속은 변해가고 있다. 

세월이 변함에 따라서 변한 김장 풍속도, 올해도 어김없이 절임배추를 주문해 김장을 한다. 세월 따라 김장 김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아이들과 살아가지만, 아직은 김장철에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찾아오는 다른 이들도 있어 천만다행이다.  

김장독을 뒤뜰에 묻어 한겨울에 꺼내 먹는 맛,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어떤 것이 현명한 것인지 모르지만,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지지고 볶던 김장풍습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있다. 오로지 편함만을 추구하는 풍경인 듯해 씁쓸하기도 하지만, 가족이 모여 자잘한 정을 주고받을 수 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내 나이 탓이려나 궁금하기도 하다.   
#가을 #김장 #김치 #절임배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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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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