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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달려가 사람 살리고 떠난 이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순직소방관 196명 이곳에 잠들다

등록 2023.11.09 17:30수정 2023.11.0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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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복만 입으면 불 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화재 현장뿐만 아니라 수해 현장, 교통사고 현장, 산, 바다, 계곡 조난 현장 등 그 어느 곳에도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방관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꺼이 위험 속으로 자신을 내던집니다. 11월 9일 소방의 날에 대전 현충원 소방공무원 묘역을 소개해 드립니다.

2023년 10월 31일 현재 대전 현충원에는 소방공무원 총 153분이 안장되어 계십니다. 서울 현충원과 이천·영천·임실·괴산 호국원을 통틀어서 2022년 기준 235분 소방관이 계신데요. 소방공무원과 의용소방대를 합쳐 대전 현충원에는 196분의 소방관이 잠들어 있습니다. 순직 소방관 전체 80% 이상이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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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방장 김신형의 묘 (순직소방관묘역 126호) ⓒ 김선재

 
소방공무원 묘역 126호, 127호, 128호에는 각각 김신형 소방장, 김은영 소방사, 문새미 소방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2013년 3월 30일 9시 30분 무렵 아산소방서에서 출동 벨이 울렸습니다. '고속도로에 개가 줄로 묶여 있다'는 신고였습니다. 개를 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개로 인해 더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신형 소방관은 당시 임용예정자로 현장 실습을 나와 있던 김은영, 문새미 교육생과 함께 소방차를 타고 출동했습니다.

세 명 소방관이 출동하니 강아지 한 마리가 덩그러니 줄로 묶여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구조하기 위해 소방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소방차 앞에서 안전조치를 취하며 구조에 필요한 장비를 챙기는 바로 그 순간. 25톤 트럭 한 대가 시속 70km 속력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속도를 줄여야 하는 트럭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그대로 소방차 후면을 추돌했습니다.

추돌에 밀린 소방차는 속절없이 앞으로 밀려갔습니다. 그렇게 소방차 앞에서 구조를 준비하던 소방관을 덮쳐버렸습니다. 추돌 당시 충격으로 육중한 소방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졌습니다. 실습 중이던 두 교육생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신형 소방관는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후 경찰 조사에 따르면 소방차를 들이받은 트럭 운전기사의 음주 측정 결과 술을 마신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고 당시 라디오를 조작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주시하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김신형 소방교는 사고 당시 결혼 6개월 신혼부부였습니다. 사고로 인해 처참하게 찢어진 제복을 보며 고인의 남편은 오열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구급 출동 후 쓰러진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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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방경 강연희의 묘 (순직소방관묘역 133호) ⓒ 김선재

 
소방공무원 묘역 133호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익산소방서 소속 강연희 소방경입니다. 2018년 4월 2일 새벽 1시 27분이었습니다. '익산역 앞 도로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술에 취한 사람이었다면 소방관이 출동하지 않았을 텐데요. '구급 출동이 필요하다'는 신고에 강연희 소방관은 구급차를 타고 급하게 출동합니다.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지나던 차가 치고 갈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강연희 소방관은 우선 안전을 확보한 후, 주취자를 구급차로 옮겼습니다. 사건은 그를 이송하는 과정에 벌어졌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흥분하며 강연희 소방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강 소방관의 머리부위를 주먹으로 대여섯 차례 때렸고, 차마 글로도 쓸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습니다.

소방관을 폭행한 가해자는 전과 44범 상습범이었습니다. 한 청소년 수련원에서 경비원에게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고, 술 자리를 같이 하던 지인에게 "안주를 많이 먹는다"며 뒷통수를 둔기로 후려치기도 한 전적이 있었습니다. 마트에서는 외상을 요구하며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3차선 도로에 드러누워 교통을 방해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폭력이 급기야 구급대원 소방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사건 이후 강 소방관은 불면증, 어지럼증과 딸꾹질에 시달렸습니다. 구토와 경련도 이어졌습니다. 4월 24일 뇌출혈로 쓰러졌고 응급수술까지 받았지만 5월 1일 세상을 떴습니다.

강 소방관 사망 이후 새로운 논란이 생겼는데요. 국가는 이 죽음을 '위험직무순직'이 아닌 '일반순직'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당시 인사혁신처에서 소방공무원, 경찰, 군인, 교도관 중 위험한 직군에 한해서만 '위험직무순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유족과 동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게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공무원에 대한 예우냐"며 동료들은 세종 정부청사에서 릴레이 1인 시위에 나섭니다. 강 소방관의 유골은 1년 넘게 한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는데요. 동료들이 나선 집단 행동으로 인해 결국 정부는 2019년 4월 30일 '위험직무순직'으로 인정했고, 강 소방관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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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청 항공조종사 김종필의 묘 (순직소방관묘역 146호) ⓒ 김선재

 
2019년 10월 31일 독도해역에서 긴급 신고가 접수됩니다. 홍게잡이에 나섰던 어선에서 한 선원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손가락을 접합하기 위해서 육지 병원까지 한시라도 서둘러 이송되어야 했습니다. 중앙 119구조본부 영남119특수구조대 소속 다섯 명 대원은 HL9619 소방헬기에 탑승해 독도해역으로 날아갔습니다. 밤 11시 20분쯤 헬기는 독도에 도착했습니다.

부상자를 싣고 다시 육지로 날아가던 바로 그때 11시 26분경 헬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새카만 동해 바다 한 가운데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2023년 11월 6일 사고 원인이 발표되는데요. 조종사의 '공간정위상실'이 원인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밝았던 독도 헬기장에서 어두운 해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조종사는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등대와 조업 중인 어선에서 나오는 불빛 그리고 승무원들의 피로가 사고 발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망망대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뛰어들었던 다섯 영웅은 대전 현충원 순직소방관 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습니다. 순직소방관 묘역 142호 서정용 검사관, 143호 이종후 기장, 144호 박단비 소방교, 145호 배혁 소방장, 146호 김종필 기장입니다.

20대 소방관의 마지막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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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장 김국환의 묘 (순직소방관묘역 148호) ⓒ 김선재

 
순직소방관 묘역 148호에는 김국환 소방장이 잠들어 있습니다. 2020년 7월 31일 순천소방서 김국환 소방관은 '친구가 계곡물에 빠졌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합니다. 장마로 인해 계곡물이 불어있었는데도 5명이 물에서 놀다가 1명이 물에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김국환 소방관은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연소 특전사로 군생활을 했고, 1480여 건 출동해서 540여 명 생명을 구한 영웅 중 영웅이었습니다.

이번 임무에서도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위험한 현장으로 스스로를 내던졌습니다. 일주일 이상 비가 내린 지리산 피아골에는 계곡물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김국환 소방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안전 장구를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망설임 없이 계곡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김국환 소방관의 마지막 다이빙이 됐습니다. 갑자기 급류가 쓸려 내려왔고, 김 소방관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갑니다. 그를 지탱한 로프를 잡고 있던 동료는 손 힘줄이 끊어질 정도로 로프를 끌어당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평소 불우이웃 돕기에도 앞장 설만큼 마음이 따뜻했고, 밝고 적극적이었던 28세 젊은 소방관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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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령 김동식의 묘 (순직소방관 155호) ⓒ 김선재

 
2021년 6월 17일 오전 5시 36분 무렵 이천 마장면 쿠팡 물류센터는 화마에 휩싸였습니다. 인근 소방서 모든 인력이 총동원되어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광주소방서 김동식 소방관도 함께했습니다.

불이 난 지 2시간 40여 분쯤 지났을 무렵 큰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김동식 소방관은 동료 네 명과 함께 혹시 모를 인명 구조를 위해 건물 2층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에 가득 쌓여 있던 적재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불이 붙어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김동식 소방관은 소방대장이었습니다. 대열 맨 선두에서 대원을 이끌었고 구조를 지휘했습니다. 긴급하게 탈출해야 할 때가 오자 대장의 위치는 맨 후미가 되었습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소방관들은 지하 2층에서 지상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이 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식 소방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은 절규하며 다시 김동식 소방관을 구하기 위해 불길로 뛰어들었습니다. 김 소방관의 산소통에는 단 20분 정도 버틸만한 공기밖에 없었습니다. 대원들이 김 소방관을 구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원망스럽게도 불길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유독가스와 열기가 가득했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붕괴 위험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김동식 소방관은 실종된 지 47시간 만에 지하 2층 입구 5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현장에 가면 부하 소방관이 다치지 않도록, 누구보다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힘든 일을 도맡아 했고, 쉬는 날에도 훈련에 매진하던 영웅이었습니다. 대전 현충원 순직소방관 155호 묘역에서 잠들어 계십니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쿠팡 측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화재를 최초로 목격한 직원이 화재 신고를 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휴대전화를 수거해갔기 때문에 신고가 지체되었습니다. 오작동을 이유로 스프링클러는 화재 수신기가 정지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원인이 모여 결국 소방관까지 순직하는 대형 참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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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교 성공일의 묘 (순직소방관묘역 166호) ⓒ 김선재

 
대전 현충원 순직소방관 묘역 166호에는 새내기 소방관이었던 성공일 소방교가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성공일 소방관은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소방관이 꿈이었습니다. 학교의 궂은일은 자기가 도맡아 했고, 어려운 친구를 돕는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소방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험에 세 번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뜻을 꺽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도전에서 꿈을 이뤘습니다. "비록 일은 고되지만 남을 도울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며 친구에게 소방관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김제소방서에서 근무하던 성공일 소방관은 2023년 3월 6일 오후 8시 33분 화재진압을 위해 출동합니다. 김제시 금산면 한 단독주택에서 불이 났는데요. 집에는 70대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성 소방관은 할머니로부터 "집 안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명 구조는 2인 1조로 이루어져야 했지만, 성 소방관에게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홀로 화재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순직한 열흘 뒤 16일은 그의 생일이었습니다. 성 소방관은 함께 살던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그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지만, 끝내 가족과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2023년 기준 최근 5년간 현장에서 소방관 24명이 순직했고 2238명이 다쳤습니다. 또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소방관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 10년간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이 순직한 소방관보다 3배나 많았습니다.

대전 현충원 소방공무원 묘역 영웅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숙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자기 한 몸 바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이들이라 할 지라도, 해가 갈수록 묘역 안장자가 이대로 늘어나도 좋은지 말입니다. 소방의 날 대전 현충원에서 소방 영웅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참고자료
- 순직소방공무원 추모백서 <기억을 향한 기록> (소방청, 2022) - 순직소방관추모관 (https://www.nfa.go.kr/cherish/)
#대전현충원 #순직소방관 #소방의날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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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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