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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형편에 부모님 원망... 이런 내가 싫었다

무섭게 나를 닮은 제자들에게 '요즘 어때'를 묻게 되는 이유

등록 2023.11.27 15:53수정 2023.11.2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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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이던 시기 부모님은 시장 뒤편 좁은 골목에서 계란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계란이 가득 실린 파란 포터 트럭을 자가용처럼 쓰셨고, 어머니가 항상 달고 계시던 명찰에는 이름 대신 '구포계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 집은 방이 두 개뿐이라 형과 내가 한 방을 썼는데, 사실 그보다는 부엌 겸 거실로 쓰는 공간이 너무 좁아서 밥을 먹을 때마다 화장실 문 앞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 더 불편했다.

당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를 절대 집에 데려오지 않았고,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서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집 형편에 대해, 가난과 가난하지 않은 것의 기준에 대해 자주 고민했다.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가난과 쪽팔림을 생각하는 나의 도덕성을 의심했다.


'수창이는 집도 좀 크고 컴퓨터도 좋던데, 그건 수창이는 중산층이고 우리집은 가난하다는 건가? 아니면 수창이가 부자고 우리집이 중산층인 건가?'
'아△△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그럼 가난한 건가?'
'학원비는 걱정하지 말고 학원 다니고 싶으면 다니라고 말씀하시는 건 형편은 힘들지만 노력해보자는 말인가?'
'비싼 신발 사도 어차피 발이 커져서 의미 없다는 엄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퓨△ 대신 파마라고 적힌 신발을 신어야 하는 건 가난해서 그런 거 아닌가? 다른 애들도 다 그런가?'
'잘 살지는 않아도 그렇게 못 사는 건 아니지 않나. 부모님 열심히 일하시는데 쪽팔린다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닌데.'


파마라는 글자가 보일까 바지 밑단을 내리며 걸을 때마다 고민은 깊어졌지만, 어차피 우리는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게임을 하고 같은 학원에 다녔다. 같은 것을 하나둘 떠올리면 내 고민이 정말 쓸데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중학교 내내 반장을 하고 성적도 잘 받는 모범생이었다. 멋진 계기는 없어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고등학교에서도 이렇게만 하면 사범대 가서 원하는 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담임선생님은 가능성이 있다며 OO국제고 지원을 추천했고, 부모님은 더 큰 세상에서 공부시키면 좋겠다는 담임선생님 말에 온 마음을 뺏겼다.

'인문계 가서 열심히 하면 충분하다. 선생님 되려는데 특목고가 왜 필요하냐' 같은 나름의 이유를 들며 거부했지만 부모님은 완강했다. 원서접수 마지막 날, 결국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 거짓말은 담임선생님 전화 한 번에 들통났다.


그 길로 달려온 파란 포터 트럭에 붙잡혀 나는 큰물에 간다는 것에 대해, 삶을 바꿀 기회의 희소성에 대해 몇 시간을 듣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결국 OO국제고에 지원했고 입학했다.

나를 미워하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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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시간에는 테니스를 배우고, 교내 수영장에서 수영 수업을 듣는다. ⓒ elements.envato

 
국제고는 한 학년에 20명씩 8개 학급만 있다. 체육 시간에는 테니스를 배우고, 교내 수영장에서 수영 수업을 듣는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아침밥은 한식과 양식이 동시에 나와 기호에 따라 선택해서 먹는다.

동아리는 여러 인권 단체와 협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2000년대 초에 이미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골라 듣는 시스템을 사용했다. 영어 시간에는 토플 수업을 하고, 필수 선택 과목인 제2외국어에는 러시아어도 있었다.

여기에 적은 것, 그리고 다 적지 못한 것까지. 국제고를 이루는 모든 것이 나에게 고통이었다. 수업 시간부터 생활의 작은 장면까지 전부.

영어 수업 첫 시간, 오직 영어만 사용하는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목소리들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을 틀어놓은 것 같았다. 대화의 내용이 즐거운지, 슬픈지, 혹시 비극적인지 도통 알 수 없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나도 다른 학생들처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 사이 선생님은 내게도 뭐라고 하셨지만, 분명 내 눈을 보고 무엇을 말했지만,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결국 옆 친구가 대신 손을 들고 무엇을 말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수업이 재미없다며, 첫 시간부터 무슨 남북관계를 토의하냐고 불평했다. 나는 남북관계는커녕 못 알아들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서로의 취미와 관심사를 확인하며 친해지던 학기 초, 친구들은 통기타를, 피아노를, 바이올린을, 하여간 각자의 악기를 말했다. 나는 악보도 못 보는, 리코더도 못 부는 아이였다. 내 버킷리스트에는 해외여행이 적혀 있는데 걔들의 버킷리스트에는 해외여행이 아니라 해외에 사는 것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해외여행은 방학을 보내는 평범한 방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교실에 무심하게 놓여있는 아이팟과 맥북을 보며 나는 국제고 합격 선물로 받은 빨간 아이리버 MP3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고, 하나뿐인 데스크톱을 기숙사에 가져오면 형은 어쩌나 걱정했던 나의 고민을 조용히 덮어야 했다. 춥다는 핑계로 룸메이트가 의자에 걸어둔 초록색 기모 후드티를 빌려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으면서 슬펐다.

겉보기와 다른 내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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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힘겨웠던 일은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elements.envato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학교로 돌아올 때는 산 중턱 학교까지 이어지는 언덕을 반드시 올라야 했다. 물론 피곤한 월요일 아침에 그 높은 언덕을 걸어 올라갈 사람은 없었고, 다들 택시를 타거나 부모님 차를 탔다. 어머니 역시 태워주지 못해 미안하니 택시를 타라며 매주 5만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기숙사에서 친구들 야식 시킬 때 괜히 빠지지 말고 남은 돈 전부 써도 된다는 말과 함께.

사실 일주일 용돈으로 5만 원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큰돈으로도 택시비와 야식비를 모두 충당할 수 없었다. 결국 야식을 거절하거나 택시를 거절해야 했고 나는 택시를 거절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언덕 입구에서 내릴 때마다 나는 늘 생각했다.

'제발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제발 타라고 말하지 마라.'

내 기대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매번 누군가는 차를 멈춰 세웠고 언덕이니 얼른 타라고 했다. 차에 타면 '부모님이 바쁘신가 보다'라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준 화려한 미키마우스 캐리어를 친구 캐리어와 함께 싣고 내리는 과정도 힘겨웠다.

집에서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몇 년 만에 특목고를 진학한 자랑스러운 졸업생이 되었고, 내 이름이 적힌 학원 홍보 자료는 한동안 동네에 나뒹굴었다. 가끔 만난 중학교 친구들은 이제 재식이는 급이 다르다며 칭찬인지 거리두기인지 모를 말을 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이왕 갔으니 교사가 아니라 교육행정가 정도를 꿈으로 가지면 어떠냐는 말도 했다.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PC방과 학원을 오가며, 가끔은 롯△△아에 모여 노는 그런 생활.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범대에 가는 그런 내 세상. 이제 그런 세상은 없었다. 그 대신 자랑스러운 아들. 가까이하기엔 급이 달라진 친구. 열등감에 찌들어 입을 닫은 아이가 남았다.

수업 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는 학생. 나는 내 세상을 잃은 채 그 이질적인 단어들 사이 어딘가를 부유했다. 이제 학교에서 내가 사범대에 갈 수 있다고,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힘겨웠던 일은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학교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내가 돈이 없다고 놀린 적 없고, 캐리어가 이상하다고 놀린 적 없고, 영어를 못한다고 놀린 적 없었다.

나만 당당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현실이 싫었다. 공부도 창밖 그만 쳐다보고 뭐라도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됐다. 야자시간 내내 전자사전과 씨름하며 해석해둔 토플 지문 하나가 수업 십 분 만에 스치듯 지나갈 때, 내가 너무 한심하고 너무 어이없어서 다시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내가 나를 미워했다. 학교생활 어떠냐는 질문에 잘하고 있다며 거짓말 하는 내가 싫었고, 멍하니 우리 집 형편만 생각하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어지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그냥 내가 문제였다. 이 세상에 나 빼고는 불편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있는 힘껏 나를 미워하며 고등학교 시절 내내 입을 닫고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오랜 시간 고등학교 시절의 나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며 살았다. 이야기하면 별것도 아닌 마음을 커다란 약점처럼 가지고 살아가는 모자란 사람이 될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원하던 교사가 되었으니 이젠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고등학교에서 가끔 그 시절 나와 무섭도록 닮은 아이를 만날 때면 자꾸 물어보게 된다.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지금의 네 상황과 감정만으로 너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을 테니 할 수 있는 만큼만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조금 더 일찍 이야기해보면 좋지 않을까. 이야기해보면 열등감이 꼭 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잘못된 세상 때문에 열등감이 싹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일찍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내 물음조차 또 다른 불편함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자꾸만 묻게 된다.
#학교 #교사 #학생 #열등감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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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사랑을, 그런 사랑을 가꾸고 지키는 존재를 찾아다닙니다. 저를 통과한 존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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