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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은 어디에 사시나요?

주거 형태별로 배달노동자가 부딪치는 상황

등록 2023.12.05 09:20수정 2023.12.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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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노동자가 배달하기 위해 걸어가는 계단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처럼 배달하다 보면 같은 수수료라고 해도 어떤 호출은 곧바로 클릭하는데, 어떤 호출은 몇 초간 고민하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음식점과의 거리(픽업 거리), 가는 길의 난이도(직선거리인지, 언덕배기인지, 다리를 건너는지, 위험한 길은 아닌지), 음식의 부피와 무게(국물이나 찜은 무거워서 피하고, 회·스테이크·탕후루 등은 가벼워서 좋음)에 따라 순간순간 직감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또 다르게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배달지의 주거 형태입니다. 제 기준으로 편의상 다가구주택, 빌라, 아파트, 이렇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가장 좋은 곳은 '신축 빌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찾기도 쉽고, 층수도 낮고, 한 층에 여러 세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엘리베이터도 있고 세대 수가 적어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일괄적으로 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주거 형태별로 만날 수 있는 상황에 따라 구분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다가구주택

다가구주택이 위치하는 곳은 웬만하면 오래된 동네입니다. 그래서 골목골목 들어가야 합니다. 혹은 자전거로도 가기 어려운 계단이 많은 곳을 지나가야 하는 곳도 있죠. 대략 동 이름이 뜨면 느낌이 옵니다. 

다가구주택 앞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문을 열어 봅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다행인데 잠겨있다면 초인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초인종에 정확하게 층이나 방 번호가 써 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무 초인종이나 눌러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전화해야 합니다. 이 과정 자체가 번거롭습니다. 다른 주거 형태는 곧바로 세대 번호를 눌러서 호출하면 되는데 말이죠.

제일 빨리 전달하는 경우는 그냥 대문 앞에 두고 가라는 요청 사항이 있을 때입니다. 외부에 음식을 두고 가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고객 요청 사항대로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때 가장 애매한 경우가 세대 번호가 없는 집입니다. 요청 사항에 '올라와서 오른쪽 집' 혹은 '안쪽 집' 이렇게 되어 있으면 안 그래도 바빠서 마음이 급한데 대단히 헷갈릴 경우가 많습니다. 

제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은 집 앞에서 전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전달하지 않으면 찝찝함이 남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화하게 됩니다. '옥탑'까지 걸어 올라가면 다리가 좀 아프게 마련입니다. 특히나 올라가는 계단이 어둡고, 좁고, 미끄러운 곳이 많아서 날씨 안 좋을 때는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빌라

앞서 얘기했지만 제일 찾기 쉽고 배달 사고 안 나는 곳이 신축 빌라입니다. 다가구주택에서의 번거로움이 모두 해결된 상태로 배달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보통 빌라에서 2층은 외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계단을 한 번만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가구는 웬만해서는 계단을 한번 올라가야 1층입니다. 그러므로 2층을 가려면 한 번 더 계단을 올라가야 하죠.

물론 계단 숫자가 많지 않으니 큰 차이는 없지만,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빌라가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빌라들의 장점은 1층에 잠금장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정 하나만 생략돼도 전달 시간은 엄청나게 단축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다리 운동 제대로 하게 됩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데 왜 꼭 위치는 5층 이상일 때가 많은지 참 신기합니다. 건물 리모델링을 했는지 6층 이상을 걸어 올라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동네가 대학가(경희대, 외대, 시립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주변이라 대학생들이 자취하는 방이 많습니다. 깜짝 놀랄 때가 언제냐 하면 면적이 그리 넓지 않은데 방 개수가 예닐곱 개 있을 때입니다. 방문을 열어 보진 못했지만 얼마나 좁을까 싶어 안쓰럽더군요.

아파트(오피스텔)

갈수록 지상으로 아파트 드나들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싼 돈 들여 사는 공간이니만큼 아파트 내부의 다양한 문화, 놀이, 휴게 공간을 외부에 개방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개방했을 때 사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미리 차단하고 싶은 의도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밖에서 보기에는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놓고 사는 건 아닌지 답답하기도 하고 혹시나 아파트 내부에 큰 재난이 생겼을 때 소방차 접근이나 구조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데 괜찮나 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도 하게 됩니다.

배달하는 저로서는 매우 큰 불편함이 생깁니다. 지상으로 드나들지 못하면 결국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전거로 통행해야 하기 때문에 각별히 안전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도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잠시나마 눈, 비, 바람, 추위를 피하는 시간이 되기도 해서 마냥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지하 주차장 바닥은 매우 미끄럽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동대문에도 초고층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제 기준에 초고층은 30층 이상인데요, 최근에는 50층까지 올라가 봤습니다. 초고층 아파트들은 엘리베이터 속도도 꽤 빠르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꽤 걸리기 때문에 기피하는 곳이긴 합니다.

익숙하게 오가는 건물은 상관없지만, 잘 모르는 동네를 갔을 때 아파트 혹은 오피스텔과 2, 3층의 상가동이 붙어 있으면 길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잘못했다가 상가동만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버튼이 3층까지만 있을 때) 정말 짜증 납니다. 다시 주거동 엘리베이터를 찾으러 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10층 이상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소비자가 무조건 올라오라고 한 갑질 사건이 언론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저도 몇 번 경험이 있었는데요, 배달 경험 초기에 비 오는 날 쌀국수를 17층까지 들고 뛰어 올라갔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같으면 고객에게 전화해서 중간에서 만나자고 하는데요,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어서 정말 계단을 온갖 욕을 다하며 올라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언론에 알려진 경우는 사실 극히 일부의 사례라 믿습니다. 제가 전화할 때마다 고객들이 알겠다며 몇 층을 내려와 음식을 받아 갔거든요.

배달할 때야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 하지만, 돌아서고 나면 제가 배달한 음식을 받아 든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햇빛도 안 들어오는 다가구주택의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노동자), 청년들의 닭장 같은 좁은 방들, 옥탑까지 매일 오르내려야 하는 사람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아파트 주민들까지. 저의 개인적인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그곳에 살아는 고객님들 모두 맛있게 밥을 먹고 행복하길 빌어봅니다.
덧붙이는 글 김창수 기자는 우리동네노동권찾기 대표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1,12월호 '올라잇'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배달노동 #배달노동자 #라이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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