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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4억 원 쏟고 29표...정부와 언론의 사기극, 그냥 둬야 하나

[언론비평] 한국 언론의 부산 엑스포 보도, 일제 시대 '대본영 발표'가 떠오른다

등록 2023.12.06 13:26수정 2023.12.0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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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본영 발표'와 '발표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본영은 일본제국이 침략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설치한 군 총사령부입니다. 대본영은 태평양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846차례 발표를 했습니다. 초반 승전 때는 사실 중심으로 발표했지만, 점차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뻥튀기 조작 발표를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대본영 발표' 베끼며 태평양전쟁에 부역한 일본 언론

한 예로, 대본영은 1944년 10월의 대만 항공전 때 일본군이 미군 항공모함 19척을 격침했다고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항모 4척에 작은 피해를 준 데 그쳤습니다. 태평양전쟁 전 기간에 손실된 미 항모가 모두 11척이었으니, 당시 대본영의 정보 조작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만합니다. 그런데도 일본 언론은 이런 대본영의 왜곡·조작 발표를 의심도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심지어 왜곡·조작인지 알면서도 국익을 위해, 회사 이익을 위해 대본영 발표를 대서특필했습니다.

일본에서 발표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하라 도시오 전 <교도통신> 사장은 발표 저널리즘의 폐해가 가장 크게 나타났던 사례로, 대본영 발표를 그대로 보도해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내몬 일을 꼽은 바 있습니다. 이런 보도가 결과적으로 전쟁을 돕는 꼴이 됐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기자들은 비(B), 시(C)급 전범에 해당할 정도라고 비판했습니다.

대본영 발표식 보도와 다름없는 한국의 부산 엑스포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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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51까지 쫓아왔다"… 2차 투표서 사우디에 역전 노려'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2023년 11월 24일자 보도와 '"49대51까지 따라왔다"… 결선서 대역전극 'BUSAN is Ready''라는 제목의 <매일경제> 2023년 11월 21일자 보도 ⓒ 조선일보, 매일경제


일본에서는 지금도 실제 상황과 다른 정부나 기관, 기업 등의 거짓 발표를 '대본영 발표'라고 부릅니다. 상황이 나쁘거나 나빠지고 있는데도 좋다거나 좋아지고 있다고 호도하는 걸 가리키는 관용어로 굳어진 것이죠. '발표 저널리즘'이란 용어에는 대본영 발표를 그대로 답습한 일본 저널리즘에 대한 반성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언론계에서 대본영 발표와 발표 저널리즘이라는 두 용어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부 발표를 확인 없이 함부로 쓰면 '큰코다친다'라는 걸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 '119 대 29'로 참패한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취재했던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 아니 보도가 아니라 '홍보'를 보면서, 대본영 발표라는 단어가 문뜩 떠올랐습니다. 표결 전에 우리나라 주요 언론이 전한 엉터리 보도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대본영 발표 보도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대본영 발표식 보도보다 훨씬 더 못했습니다. 엑스포 참사에 부역한 죄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본영은 거짓이지만 공식 발표라도 했고, 당시 일본 언론은 그걸 그대로 받아썼습니다. 하지만 이번 부산 엑스포 기사는 공식 발표도 아닌 정부 또는 재계 관계자의 거짓 정보를 충실하게 옮기는 데 급급했습니다. 정부의 거짓을 신뢰만 했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검증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대본영 발표를 베껴 쓴 가짜뉴스에 관해 전후에 대대적으로 반성이라도 했지만, 우리 언론들은 엑스포 가짜뉴스 남발 뒤 반성의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최고의 신문'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조선일보>는 투표 며칠 전 "49 대 51까지 쫓아왔다...2차 투표서 사우디에 역전 노려"라고 대서특필(11월 24일 자)하더니 참패로 드러나자, 정부의 정보력 부족과 소통 부재를 탓하며 책임을 은근슬쩍 다른 데로 떠넘겼습니다. 조선일보뿐 아니라 대다수 주요 신문과 방송은 참패 뒤에도 '석패',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운운하며 반성 없는 후안무치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최대 피해자는 국민, 최고 수혜자는 한덕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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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실패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한덕수 국무총리, 박형준 부산시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8일 오후(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73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2030세계박람회 개최지 발표 상황을 지켜보며 탈락에 아쉬워하고 있다. ⓒ 사진제공 총리실


정부가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쓴 예산은, 지난해 2516억 원, 올해 3228억 원 모두 5744억 원입니다. 이 많은 돈을 퍼부으며 고작 29표를 얻었으니 한 표당 198억 원을 쓴 셈입니다. 이마저 국비만 계산한 것입니다. 부산시에서 쓴 지방비와 기업들이 쓴 돈까지 합치면 푯값은 더욱더 상승할 겁니다.  

엑스포 유치가 참패로 끝나면서 바로 사과를 했다고 해서 윤 대통령이 엑스포 참사의 최대 피해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실은 국민이 최대 피해자입니다. 민생고에 허덕이며 낸 혈세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낭비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관가에서는 대표적으로 엑스포를 기화로 나랏돈을 펑펑 쓰며 그동안 못 다녔던 세계 곳곳을 여행한 한덕수 총리와 엑스포 유치 활동을 총괄 지휘하며 호가호위했던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관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부산 엑스포 지지를 호소한답시고 여간해서 가기 어려운 몰타와 안도라를 방문했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예외가 아닙니다.

윤 대통령이 잦은 해외 순방을 하며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거센 비난을 받지만, 한덕수 총리도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은 여행을 했음이 확인됐습니다. 총리실 누리집을 보면, 한 총리는 지난해 취임 이후 1년 6개월 동안 13차례 해외 순방에 나섰습니다. 지난해 5번, 올해 8번입니다.

그중에서 엑스포 유치를 명분으로 나간 것만 10차례이고, 올해 10월 이후만 4차례 2주에 1번꼴로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무려 5번이나 방문했습니다. 참고로, 문재인 정권 때 총리를 역임한 이낙연(2017~20년 1월) 총리는 12회, 정세균 총리(2020년 1월~21년 4월) 1회, 김부겸 총리(2021년 5월~22년 5월) 1회 해외 순방을 했습니다.

정부·국회는 유치 활동 실패 책임 묻고, 언론은 오보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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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청사 외벽에 걸려 있던 엑스포 응원 현수막이 철거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와 언론이 이인삼각으로 벌인 사기극의 실태가 표결로 확인되면서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혈세를 펑펑 쓰며 누가 어디서 어떤 장난을 했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거의 없습니다. 한 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세계 곳곳을 누빈 것이 엑스포 유치를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는지 엑스포 유치를 빙자한 여행 놀음이었는지 여전히 구름 속에 가려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매우 궁금해합니다. 왜 그토록 많은 돈을 퍼붓고도 겨우 29표밖에 얻지 못했는지, 이런 참사를 낳은 원인과 책임자는 누구인지, 대통령이 사과했는데도 물러나겠다고 나서는 부하는 왜 아무도 없는지, 언론은 누구 말을 듣고 금세 들통날 가짜뉴스로 도배했는지 등등 말입니다. 심지어 4일 이뤄진 개각에선 외교부에서 엑스포 유치 활동을 책임졌던 오영주 2차관이 문책은커녕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발탁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은, 국민의 준엄한 물음에 응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정부가 스스로 참사의 실태를 밝히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회가 국정조사라도 해서 엑스포 참사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언론도 이런 엄청난 오보가 나온 원인을 철저하게 검증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언론도 부산 엑스포 패전의 비(B), 시(C)급 전범 정도 죄를 범했다는 비난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한국언론 #부산엑스포 #발표저널리즘 #대본영발표표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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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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