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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떠날 수 있도록..." 의사를 찾는 노동자들의 사연

고용허가제 사업장 변경 제한, 이주노동자의 족쇄가 되다

등록 2023.12.07 14:02수정 2023.12.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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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자의 작업 모습. ⓒ unsplash

 
2022년 초부터 40여 명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을 만나 업무적합성 상담을 해왔다. 이전에 했던 업무적합성 상담과 비교했을 때, 이주 노동자들과의 상담은 그 배경부터 결과까지 맥락이 완전히 달랐다. 내국인 노동자의 업무 적합성 평가가 '보건 관리', '건강 보호' 차원의 일이라면, 이주 노동자의 업무 적합성 평가는 '비상 탈출', '긴급 구조' 같았다.

일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사 소견이 필요한 사람들

업무 적합성 평가는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현 업무를 계속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적합과 부적합 양자택일이 아니라, 현 업무를 계속해도 된다, 이러저러한 조건에서라면 해도 된다, 한시적으로는 이 일을 하면 안 된다, 영원히 이 일은 하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분별하여 평가한다. 평가의 근거, 업무 수행 시 전제되어야 할 조건 등도 구체적으로 적는다. 이 평가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건강이 일 때문에 더 악화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사업장 보건 관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업무 적합성 평가 상담은 그리 흔하지는 않다. 대개 규모가 크거나, 노동조합이 있거나, 산재 발생 등을 계기로 안전보건관리에 민감해진 사업장 노동자들이 평가를 받으러 온다. 사측의 요구로 평가를 받는 경우도 흔하다. 질병 치료 뒤 복귀할 때나 건강진단에 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과연 그 노동자에게 종전 업무를 계속하도록 해도 괜찮을지 전문가의 소견을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노동자 건강이 염려되어서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의 소견에 따랐을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속내도 종종 엿보인다. 그러나 사업주의 마음씨가 어떻건 올바른 '보건관리' 방향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제도의 역할이므로, 평가 소견서에 노동환경 개선 방향을 잘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은 회사에서 건강을 이유로 업무 배치를 바꾸거나 재계약을 망설이고 있으니 자신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소견서를 써달라는 노동자들도 있다. 이럴 때는 기존의 고용이나 임금 수준을 유지하고 싶은 노동자의 심경에 공감하면서도 이대로 계속 일하는 것이 정말로 안전할지 엄밀히 따져본다. 노동환경 개선을 권고할 때도, 사업주가 너무 부담을 느껴 이 사람의 고용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도록 소견서의 온도 조절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그런데 이주 노동자들은 반대로 지금의 업무를 계속하면 안 된다는 판정을 기대하며 찾아온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 건강 상태로 보아 지금의 사업(장)을 계속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다른 사업(장)에 종사할 수는 있는 건강 상태임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다.


회사를 옮기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냐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3년간의 체류 동안 최대 세 번까지만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 회사가 휴·폐업을 하거나, 사업주가 근로 계약을 연장하지 않거나, 건강상 업무 부적합 판정을 받는 등 사업장 변경의 모든 경우를 합쳐서 단 세 번이다. 이 기회를 모두 사용한 뒤에는 한국을 떠나거나 미등록 상태로 불안하게 지내야 하므로 많은 이들이 어지간하면 참고 일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지간하지 않을 지경'이 될 때까지 참다가 상담하러 온다. 과연 이 몸으로 다른 일을 해도 괜찮을지 걱정될 상태가 되어서야 온다. 산재 신청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으면 거의 모두 고개를 젓는다. "일할 수 있어요. 돈 벌어야 해요." 그리고 다들 이렇게 덧붙인다. "제발 이 회사를 떠날 수 있게 해주세요."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일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의사를 찾아 부탁해야 한다니, 너무 부조리하다.

아파도 견디라고 강요하는 한국 사회

서른 살의 남성 A씨는 샷시용 유리문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종일 30~40kg의 제품이나 자재를 맨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트럭에 싣고 내렸다. 입사 6개월째부터 허리가 아팠다. 약을 사 먹거나 물리치료를 받으며 1년 넘게 버텼다. 그런데 몇 달 전 한국인 동료가 요통이 심해 퇴사하고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하면서, 요통이 극심해졌다.

비싼 신경차단 주사까지 맞아봤지만 더는 전처럼 무거운 제품을 번쩍번쩍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사장님은 절대로 내보내지 않겠다며 아프면 무급 휴직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가만히 숨만 쉬어도 기숙사 방값은 빠져나갔다. 출근을 한 날도 일을 잘 못 한다며 임금을 깎았다. 주사 치료를 더 받고 싶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B씨는 키가 상당히 작고 말랐다. 다섯 달 전부터 총 세 명이 일하는 작은 석재 공장을 다녔다. 적게는 45kg에서 많게는 130kg이 넘어가는 도로 경계석 화강암을 자르고 운반하는 일을 했다.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누워 있는 석재들을 밀고 당기고 들어 올려 나르고, 절단하기 위해 하루 200번씩 오함마를 휘둘렀다.

힘이 약하다고 다른 동료들과 사장에게 항상 욕을 들었다. 입사 일주일 뒤부터 뒷목과 등, 어깨와 위팔에 통증이 왔다. 밤잠도 설칠 지경이지만 치료는 받지 않는다. 일을 빨리 못한다는 이유로 임금이 깎여 약값을 낼 수 없는 데다가, 병원에 가고 싶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다.

C씨는 한국에 온 지 3년이 넘었다. 약 2년 전부터 목재 도어(문짝)를 만드는 두 번째 사업장에서 일한다. 커다란 목재 패널 표면에 부착된 종이 등을 벗겨내고 길이 2m가 넘는 패널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허리를 비틀며 옆쪽의 대차에 옮겨 쌓는다. 1년쯤 하고 나자 요통이 시작되더니 점점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아파왔다. 추간판탈출증을 진단받았다. 지금 회사에서 계약 기간 완료까지 일하고 싶어 참았지만, 이젠 24시간 내내 아파서 일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몸이 더 망가질까 두렵다.

D씨는 종이 스티커 공장에서 일해왔다. 종이 원단에 접착제를 바르기 위해 접착제와 희석제를 큰 통에 붓고 섞는 일,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거대한 종이 원단 심지에 회전봉을 밀어 넣는 일, 완제품을 자기 키보다 훨씬 높게 파렛트 위에 쌓아 올리는 일 등을 했고 그 결과로 허리가 망가졌다. 작업 종료 후에는 접착제가 묻은 회전봉들을 깨끗이 닦기 위해 신너를 수세미에 묻혀서 문질러 닦았다. 회사에서 주는 목장갑이 금방 흠뻑 젖기 때문에 아예 맨손으로 작업을 했다.

이 일을 한 뒤 열 손가락 끝의 피부가 모두 겹겹이 벗겨져 늘 쓰라렸다. 입사 직후 몇 주일 동안은 전신에 심한 두드러기가 돋기도 했다. 연고를 온몸에 바르고 약을 먹어가면서 견뎠다. 두드러기도 견뎠고 손가락 끝이 모두 벗겨지는 통증도 참을 수 있는데, 요통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E씨는 예전에 한국에서 '성실 근로자'로 2년 추가 체류를 하여 총 5년간 일했던 경험이 있다. 다시 한국에 와 구한 직장은 사탕 공장이다. 기계에서 쏟아져 나온 사탕을 선풍기로 식히면서 플라스틱 바가지로 퍼담아 포장 기계로 옮긴다. 전에 일했던 조선소, 플라스틱 사출 공장 등에 비하면 훨씬 편한 업무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뒤 온몸이 가려워졌다.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여 일요일 하루를 쉬고 나면 좋아졌다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증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평일 밤이면 몸을 긁느라 잠을 못 잤고, 온몸 여기저기에 긁은 상처가 남았다. 연휴에 며칠 쉬고 나니 증상이 거의 없어지는 걸 확인한 뒤 사업장을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사장은 절대로 내보낼 수 없으며, 결근하면 사업장 무단 이탈로 신고해서 '불법 체류자'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진찰하면서 보니 E씨는 저체중이었다. 원래 마른 체형이었는지 물었다. "사장이 점심값을 떼고 임금을 주는데, 돈이 너무 아까워서 점심을 굶어요. 두 달 전 한국에 들어올 때 한 신체검사보다 10kg 넘게 빠졌어요." 공장에서 다들 모여 점심을 먹을 때 혼자 허기를 참아야 한다니. 다른 끼니는 제대로 먹고 있는 걸까. 혹시 다른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마르기 전에 진작 회사를 옮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고용허가제야말로 가장 큰 유해위험요인

몸이 아파도 참고 견디며 일하기로 마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참지 않고 떠날 자유가 보장될 때만이다.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도 자기 뜻대로 떠날 수 없다면 그것은 '강제노동'이고 '노예노동'이다.

살기 위해 사업장을 떠나게 해달라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업무적합성 평가서를 쓸 때, 나는 작업환경 개선 방향을 구체적으로 권고하지 못한다. 행여 조만간 환경을 개선한다며 이들을 더 묶어두는 족쇄로 악용될 우려 때문이다.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보건관리가 아니라 긴급 구조를 위해 작성되는 업무 적합성 평가서, 이 부조리는 일차적으로 현행 고용허가제에서 기인한다.

이 노동자가 이 업무를 해도 되는가를 묻듯이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들을 초대해도 되는지 적합성을 따져 묻는다면 어떤 평가 소견이 나올까. 고용허가제가 존속하는 한, '영구적으로 불가능함'이라 평가할 수밖에 없다.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의 안전보건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노동안전보건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유해위험요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공유정옥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12월호에도 실립니다.
#이주노동자건강권 #고용허가제 #사업장변경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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