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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몸은 한국인과 다르지 않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도록 몰아넣는 악법 '사업장 변경 제한'

등록 2023.12.08 14:06수정 2023.12.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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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0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세계노동절 이주노동자 대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강제노동 철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이건희

  
2003년 공포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외국인고용법)이 시행된 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매년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E-9 비자(비전문취업비자)를 통해 한국에 오고 있고, 정부는 그 수와 범위를 계속 늘리고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은 여전히 요원하다. 이주노동자 권리 실현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치가 촘촘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족쇄를 이주노동자들에게 채운다고 지적받는 '사업장 변경 제한'이 대표적이다.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박탈한 '사업장 변경 제한'

현재 이주노동자에 대한 각종 규정은 외국인고용법에 명시하고 있다. "제25조 사업 또는 사업장 변경의 허용"은 크게 3가지 경우에 한해서만, 최대 3번까지 허용하고 있다. 첫째,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로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갱신을 거절할 때. 둘째, 사업장이 휴·폐업을 할 때. 셋째, 사용자가 법에서 명시한 이주노동자 보호 규정을 위반하였을 때. 자유로운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로막는 이 조항에 대해 무수한 비판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지난 20년간 정부는 일관되게, 법에서 규정한 조건에 해당하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옮길 수 있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떤 사유를 '허용'하는지를 논하기에 앞서,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옮길 권리를 제약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 사유 및 횟수를 제한하는 현 제도 자체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ILO의 제29호 협약이자 8대 핵심협약 중 하나이기도 한 강제노동 협약에서는 사람에게 일하도록 강요하는 '불이익의 위협'과 노동자가 자유의사에 따라 고용관계를 맺고 끊을 수 없는 '비자발성'이 존재하는 노동을 강제노동이라 규정한다.

사업장 변경 제한 제도는 이주노동자가 개인의 의사에 따라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ILO의 강제노동 규정의 비자발적 노동에 정확히 해당한다. 또한 최대 3번의 사업장 변경 횟수를 초과하는 순간 이주노동자들은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하며, 이를 무기로 사업주가 이주노동자들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불이익의 위협'에도 해당한다.

민주노총은 지난 8월, 사업장 변경 제한 제도가 ILO의 강제노동 협약을 위배함을 적시한 보고서를 제출한 상황이다. 이에 관한 ILO의 입장은 내년 2월에 나올 예정이다.


그나마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싸워낸 결과로, 그동안 사업장 변경 사유 항목이 추가되어 왔다. 2010년대 중후반 이주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숙소 상당수가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열악한 '비닐하우스'라는 사실이 공론화되자, 사업주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개정한 것이 그 예시다.

그러나 허용 사유를 추가한다고 해서, 사업장 변경 제한 제도가 가진 '강제노동'의 성격을 가릴 수는 없다. 사업장 변경 제한 제도 하에서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은 온전히 보장될 수 없다. 

계속 열악한 노동으로 내몰리는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없다는 건, 한국에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된 사업장에서 쉽게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의 존재가 이주노동자들에게서 사업주와 협상할 힘을 더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이주노조 정영섭 사무국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이 철저하게 사용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요. 근로계약을 해지할 경우 사업장을 옮길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용자가 해지하려는 경우입니다. 이주노동자가 먼저 사표를 제출할 수도 없어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박차고 나올 자유도 없으니 사용자가 이주노동자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먼저 나서서 사업장을 개선하지 않아도 되죠."

다른 국가에서 이주해 오는 노동자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 자신이 일하게 될 사업장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받기조차 어렵다. 그저 사업주 측에서 제공하는 설명을 믿으며, 내가 일할 곳에 큰 문제가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도착해서 마주한 사업장이 생각 이상으로 열악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크게 다치지 않기만을 빌면서 묵묵히 참고 일하거나, 운 좋게 자신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노조나 단체 활동가를 만나 무수한 불이익을 견디며 사업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거나, '불법 체류'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 사업장을 몰래 떠나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

사업주는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한국인'들이 꺼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유지한다. 작업 환경을 개선하지 않아도, 이주노동자들을 불러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대로 된 현장 개선 노력이 들어갈 틈은 없다.

오히려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내국인을 대신하여 더욱 열악한 노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엄청난 저임금과 매우 높은 노동강도, 온갖 노동재해 발생을 자랑하는 조선업 현장의 인력난에 대해 현장 개선 대책 마련 대신, 약 3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투입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업장의 노동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신 사업장을 옮길 권리가 법적으로 박탈된 이주노동자로 메우는 움직임은, 사실상 한국 정부가 기업과 합심하여 열악한 노동을 대신 떠맡으라고 이주노동자를 내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제노동안전보건활동가모임 김정열 간사는, 한국 조선업 현장의 열악한 상황을 잘 모르고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무수한 고충을 호소하고 있는 현실을 전한다.

"조선소가 말로만 힘들다고 들었지, 이 정도로 열악할 줄은 모르고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적지 않아요. 몇천만 원씩 빚을 지면서까지 한국에 왔는데 일은 생각 이상으로 너무 위험하죠. 그런데 일단 한 번 사업장에 발을 내디딘 순간 일터를 옮길 수도 없으니 앞뒤가 모두 막힌 거예요."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례에 해당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김정열 간사는 사업주는 물론 일선 고용센터 담당자조차도 이주 노동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 적다고 지적했다.

"법에서는 몇몇 사유에 한해서만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옮길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사례가 적다 보니 고용센터에서 일하는 분이 정작 사안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허다해요. 조선소에서 도장공으로 일하게 된 분이 페인트 때문에 피부병에 걸린 사례가 있어요. 작업환경의학과에 가서 업무 관련 평가서도 받고, 작업환경 측정 결과도 제출해도 정작 고용센터에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더라고요. 이런 일들을 여러 번 겪으니 이주노동자들에게 법은 정말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것을 느끼고 있죠."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과 고용허가제 이젠 폐지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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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0일 민주노총과 이주노동자들이 정부의 이주노동자 사업장 변경 권역 제한 조치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 호나라

 

정부에서도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제한 조항이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모르지는 않는다. 2021년 한국노동연구원이 고용노동부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사업장 변경제도 개선방안' 연구보고서는 한국의 사업장 변경 제한 조항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매우 후진적이며, 1990년에 UN에서 채택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과도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주노동자가 곧바로 이탈할 경우 발생할 사업주의 어려움'을 언급하는 등 보수적인 논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선으로 사업장 변경 제한 조항을 바라봐도 문제가 매우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사유나 횟수 제한을 폐지하되, 첫 사업장에서 1년간 계속 노동한 이주노동자만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 변경 제한 완전 폐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제안이지만, 이 제안조차 현실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2023년 10월,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은 더욱 개악되었다. 10월부터 신규 입국하거나 재입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사업장이 속한 권역 안에서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는 동의서를 작성해야만 일할 수 있다. 건설, 서비스, 조선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 한해 사업장 변경 신청 후 1개월간 새로운 사업장을 찾지 못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타 권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원래도 문제가 많았던 사업장 변경 제한이 지역 범위까지 더 좁아졌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사업장 변경 제한 조항이 문제가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개악하는 길을 택한 것은 철저히 사업주의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의 폐지는 이주노동자들의 건강권과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이주노동자라고 열악한 환경에 더 잘 견딜 수 있는 몸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신호가 너무 공고할 뿐이다. 정주노동자가 꺼리는 사업장에 이주노동자들을 강제로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장 전반의 노동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성상민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12월호에도 실립니다.
#이주노동자건강권 #사업장변경제한 #고용허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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