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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며느리'로만 평가하긴 아쉬운, 위대한 그녀의 일생

이덕남 여사 별세, 향년 79세... 중국서 독립운동가 찾는 데 역할

등록 2023.12.10 15:01수정 2023.12.1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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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며느리 이덕남 여사의 생전 모습. 필자가 2006년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이다. ⓒ 조창완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가 지난 11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1936년 중국 뤼순감옥에서 비통하게 옥사한 단재 선생에게 남은 혈육은 부인 박자혜(1895~1943) 여사 사이에 태어난 아들 신수범(1921∼1991)씨가 유일했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베이징에 있는 연경대학(지금의 베이징대) 의예과에 유학 온 박자혜 여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소개로 단재를 만나 1920년 결혼했다. 이들은 베이징 서쪽 진시팡지에(錦什坊街)의 셋집에 신혼을 꾸렸고, 1921년 음력 1월 아들 수범을 낳았다. 하지만 이불 한 채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단재는 모자를 결국 한국으로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단재는 1928년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다가 1928년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돼 루쉰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서도 우리 역사에 관한 글을 집필했던 단재는 1936년 2월 숨을 거뒀다. 어린 아들 신수범 선생에게 소식이 와 시신을 모시고 귀국해 청주에 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박자혜 여사는 한국에서 산파원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일제의 탄압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1943년 작고했다.

20대 초반에 부모님을 여윈 신수범 선생의 삶은 고통스럽기가 일제 강점기 치하랑 별 차이가 없었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의 단재 신채호를 향한 분노가 곧바로 그 아들에게도 향했기 때문이다. 단재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려 했던 이승만을 없는 나라 팔아먹으려는 악한으로 평가했다. 이런 관계를 알아서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 등이 나서 단재의 아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여느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그러했듯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 가운데 신수범 선생은 김해 출신의 이덕남 여사를 만나 1966년 결혼했고, 딸 지원씨와 아들 상원씨를 낳았다.

필자가 이덕남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베이징에서다. 그곳에서 이웃에 살았던 인연이 있다. 2004년 텐진에서 베이징으로 이사해 강효백 교수(현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를 통해 이덕남 여사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이후 단재의 유적을 답사해 <오마이뉴스> 등에 기고했는데, 이중에는 이덕남 여사를 인터뷰한 기사도 있다.(관련기사 : 서거 70년, 단재는 편히 잠들었을까 http://bit.ly/mAqLa)

이덕남 여사는 단순히 시댁 일로 신채호 선생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다가 단재 선생의 호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국적 회복에 앞장선 것도 그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만큼 단재는 일제에 의한 호적을 거부했었다. 이덕남 여사는 단재 선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호적을 얻지 못한 독립운동가 집안을 모았다. 또 수차례 폭우에 무너진 단재 선생 묘 정비에 앞장섰다.


딸 지원씨가 베이징을 중심으로 사업을 했기 때문에 주 거주지는 베이징의 한인타운인 왕징이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는 귀국해 활동했다. 2017년에는 서울, 청주에 각각 설립·운영됐던 단재기념사업회를 통합했고, 최근까지 사업회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베이징에 있으면서 단재 선생의 유적을 찾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베이징에 있는 단재 선생의 유적지들은 도시개발로 인해 이제 거의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베이징에 있는 중국 동포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며 단재에 관한 소식을 더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중국 공산상 당학교에 있어 당안(黨案)을 볼 수 있는 최용수 교수 등 많은 사학자들과 교류해 단재 선생뿐만 아니라 김산 등 중국에서 활동했던 이들을 찾아내는 데 역할을 했다. 필자는 2005년 KBS에서 광복60주년 특집으로 방송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연출 양승동PD)의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았는데, 그때도 이덕남 여사는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덕남 여사는 2019년, 16년 8개월의 베이징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사드로 인해 한중관계가 힘들어진데다 지병이 있어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 필자도 한번 찾아뵐까 생각했지만, 결국 실천하지 못한 채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줌의 재로 남으셨다는 게 너무 죄스럽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지만,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는 이들이 많지 않다. 사실 단재는 세종대왕,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인물학을 할 수 있는 드문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자신보다도 시아버지인 단재 선생을 지키기 위해 애쓰신 위대한 여성 이덕남 여사의 명복을 빈다.
#이덕남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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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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