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

도서관 방문객과 나누는 사는 이야기

등록 2023.12.21 13:56수정 2023.12.2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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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담쟁이 넝쿨 ⓒ 최승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한다는 이치가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정원의 보라색 버들 마편초는 이미 수명을 다했고, 강아지풀과 억새도 고개를 숙인 지 오래다.

생생하고 매혹적인 노란 모과는 향기로운 과실을 지상에 내려놓았고 담쟁이는 퇴색한 잎과 열매를 달고 있다. 겨울로 들어선 서학예술마을도서관 정원은 여름의 화려함과 가을의 결실을 거두고 새 생명을 준비하기 위한 긴 휴면기에 들어갔다.

겨울의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도 도서관은 지난 한 해를 마감하며 새로운 일 년을 준비한다. 도서관 자원 활동가인 나도 한 해 동안 참여했던 작가와의 만남, 만들기 활동을 통한 예술 체험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그림을 목숨처럼 그렸다"라는 화가의 강연에서 예술가의 열정을 느꼈고, 어떤 일에 대가가 되는 것은 오롯이 정성으로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사진은 빛과 어둠이 없다면 찍지 못합니다. 예술을 하면서 세상의 조화를 알아갑니다"라는 어느 사진작가의 강연 속에서 소박한 삶의 지혜를 얻기도 했다.

도서관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고 간다. 은퇴자로 보이는 사람,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 잠깐 시간이 나 방문한 듯한 사람 등을 포함하여, 문학 동아리, 중년 여행 모임 등의 단체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전북 완주로 귀농했다는 어머니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도서관을 방문했다. 자녀에게 각박한 도시 생활을 떠나 자연과 벗하는 삶을 살게 해주려고 시골로 온 지 삼 년이 됐다는 어머니는 "시골 생활의 여유로움이 좋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공부에 매달리기보다는 마음껏 뛰어노는 어린 시절을 보내도록 한다"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 흐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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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찾은 아이들 ⓒ 최승우

 
도서관 정원에 인근 초등학교 아이 네 명이 모여 서로 인터뷰 하고 이를 휴대전화에 담느라 부산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아이에게 다가가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질문하자 "네! 저희는 전주를 홍보하는 영상을 찍고 있어요" 한다. 아이들은 역할을 바꿔가며 영상을 찍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등 사뭇 심각한 모습을 연출한다.

무엇인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한 힘든 시간 속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마음을 길러주려는 담임 선생님의 마음이 짐작된다. 공동으로 과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고 각자의 마음이 한 뼘씩 자라길 기대해 본다.

어느 날 세련미 있고 곱게 늙으신 할머니 한 분이 책을 들고 도서관 이층으로 올라오신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시다가 한 책상에 시선이 머문다. "저기 누구 자리인지 책이 있네"라며 혼자 되뇐다.

서가를 정리하던 내가 "제 자리입니다"라며 푹신한 소파에 앉기를 권한다. 할머니는 "도서관의 정감 어린 분위기가 너무 좋아 시간이 날 때마다 방문한다"라고 하신다.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여러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할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파독 간호사로 3년 근무하고 왔어요. 귀국해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네요. 둘째 딸이 독일에 살고 있는데 한 번 가보려고요. 혹시 독일에 대한 자료가 있나 도서관을 방문했어요."


할머니는 말문이 틔어 자녀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지난 삶을 회고하신다.

"지난 세월은 너무 정신없이 산 것 같아요. 이제는 인생을 음미하며 살고 싶어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험한 세상을 살아오신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고단했던 지난 삶과 조금은 여유로운 지금의 삶이 겹쳐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집안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할머니의 솔직함 속에 할머니의 인생이라는 긴 장편 영화 중 단편 영화 한 편이 스쳐 지나갔다.

책은 새로운 지식과 지혜의 세계로 연결해 주기도 하지만, 잊힌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켜 주기도 한다. 마침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파독 간호사 이야기를 담은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를 권해 드렸다. 내가 권한 책이 파독 간호사 시절 할머니의 추억 안내서이면 좋겠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는 할머니는 헤어지며 한마디 하신다.

"내 이야기만 했네요. 다음에 만날 때는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할머니에게 말빚을 졌다. 채무를 갚을 날을 기다리며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한다.

도서관은 책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시선과 공감이 머무는 사람 냄새 가득한 곳이다. 여러 작가의 수많은 이야기와 진실의 소리를 품고 있는 도서관은 지혜와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길고 추운 겨울, 가까운 도서관 방문으로 움츠러드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고 온몸이 사람 냄새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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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조명과 책장 ⓒ 최승우

#도서관 #겨울 #할머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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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을 정년 퇴직한 후 공공 도서관 및 거주지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도서관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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