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면 손해? 아니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를 만났다

[리뷰] 세계명작동화 그림책 데미의 <빈 화분>

등록 2024.01.03 13:27수정 2024.01.0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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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나는 교사로 초등학교 아홉 살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공부했다. 사실은 내가 놀아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잘 논다. 놀잇감은 없어도 된다. 놀잇감이 필요하면 만들어서 논다. 종이를 뭉쳐서 눈덩이를 만들어 논다. 폐휴지통에서 제법 두꺼운 종이를 골라내기도 한다. 길게 말아서 테이프로 고정시킨 후 납작하게 해서는 장검을 만든다. 전장의 장수처럼 놀기도 한다. 요즘 TV에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방영 중이다. 고려의 양규 장군처럼 씩씩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절로 힘이 난다.

눈이 내리던 그날은 참 낭만적이었다. 놀기 딱 좋은 날. 바깥에 가서 눈을 맞고 교실로 들어왔다. 교과진도는 다 마무리되었고, 교과 수업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이때가 참 좋다. 오롯이 교사의 자율로 운영할 수 있다. 학생들과 함께 학교 도서관에 갔다. 눈과 함께 놀았으니 이제는 도서관에 가서 책이랑 놀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다들 좋다고 한다.

요즘 학교 도서관은 예전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 하고는 다르다. 매우 선진화되었다. 소장도서도 많다. 초등학생 신체에 맞는 작은 소파도 있다. 양말을 신은 채로 뒹굴뒹굴하며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 자유로운 공간은 잠시는 몰라도 40분간 책을 읽기에는 좋지 않다.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책을 놓고 앉기로 아이들과 합의했다. 아이들이 책을 가져와 앉았다. 사서교사가 수납장에서 독서대를 가져다준다. 처음 독서대를 사용한다는 아이가 많았다. 나무로 된 독서대인데 맘에 쏙 들었다. 

자유롭게 읽고 싶은 책을 읽으라고 했더니, 남자아이들은 주로 만화책을 읽었다. 교실에서는 만화책은 가급적 읽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은 그러라고 했다. 눈 때문이다. 눈이 나를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여자 아이들은 주로 동화책을 읽었다. 여자 아이 둘은 영어 원서를 읽고 있었다. 영어로 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아이들은 글도 잘 쓰고 수학도 잘하는 아이들이다. 물론 친구들과도 잘 놀고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다. 언젠가 글쓰기 시간이었는데, 비문이 있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라고 했더니 금세 알아듣고 고쳐 쓴다. 영특한 아이다. 

한 해 동안, 교실에서 아침독서를 많이 해와서 그런지 도서관에서 함께 책 읽는 태도가 매우 좋아졌다. 이럴 때 교사는 보람을 느낀다.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 선생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더 이상 아이들의 독서활동에 관여할 일이 없었다. 읽을만한 책을 찾아보았다. 30분 만에 읽을만한 책? 이럴 때는 그림책이 최고다. 그림책 코너에 갔다. 눈에 띈 것이 <빈 화분>이다. 작가 이름은 '데미'다. 중국 옛이야기나 세계 여러 나라의 위인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단다.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이 매우 넓어진 것 같았다.

임금이 나눠준 씨앗, 그런데 꽃은커녕 싹도 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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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의 <빈 화분> 앞표지 ⓒ 사계절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중국에 '핑'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핑은 식물을 기르는 재주가 있었다. 풀도 나무도 꽃도 잘 가꿀 수 있었다. 핑뿐만이 아니라 임금님을 비롯한 온 나라 사람들이 꽃을 좋아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늘 꽃향기가 실렸다. 임금님은 나이가 많아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찾던 중이었다. 이런 광고를 본 나라 안의 아이들이 꽃씨를 받아갔다. 핑도 꽃씨를 받아다가 심었다. 여러 날을 돌보았는데도 핑의 화분에는 꽃은커녕 싹도 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탐스럽게 꽃이 핀 화분을 들고 임금님을 찾아갔다.

풀이 죽은 핑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싹이 트지 않은 빈 화분을 그냥 가져가야 하는지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핑의 아버지는 정성을 들여 가꾼 결과이니 그대로 가져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핑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임금님은 핑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거였다. 알고 보니, 임금님이 나눠준 씨앗은 익힌 씨앗이었다. 익은 씨앗에서 싹이 날 턱이 있나. 다른 꾀 많은 아이들은 싹이 나지 않자 다른 꽃씨를 심어서 꽃을 피운 것이었다. 임금님은 아이들의 정직성을 시험한 것이다.

정직할 수 있는 용기 

짧은 이야기였지만 나는 큰 울림을 받았다. 핑의 정직성도 귀감이 될 만하지만, 핑의 아버지에 주목했다. 싹이 트지 않는 일로 애달아하고 있는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친 점이 인상 깊었다. 핑의 아버지는 임금님을 믿었다. 익은 씨앗을 주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간교한 속임수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그런대로 자녀의 일을 지켜봐 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녀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빈 화분을 가져가게 하였다. 빈 화분을 가져가는 핑을 놀리는 잔꾀 많은 아이들, 그들의 놀림에 당당할 수 있는 용기. 그거면 충분했다.

그 용기는 정직함에서 온다. 정직한 것, 그것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정직한 것에 왜 용기가 필요한가. 사람들은 정직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그런 측면이 보인다. 그런 사회는 병든 사회,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다. 정직한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다. 잔꾀를 부리는 사람, 남을 속이는 사람, 위조하고 조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책을 읽은 후, 도서관에서 곧바로 <빈 화분>을 타이핑하였다. 교실에 와서 아이들에게 읽어 주고 타이핑한 것을 출력하여 나누어 주었다. <빈 화분>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했더니, 바로 답이 나온다. 정직이요! 용기요. 종합해보면 정직할 용기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 
덧붙이는 글 브런치 스토리에 중복 게재합니다.

빈 화분

데미 (지은이), 서애경 (옮긴이),
사계절, 2006


#빈화분 #정직 #용기 #초등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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