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도달한 미래, 대단한 '3분 편의'를 삼키며 한 생각

경쟁 고도화되고 AI에게 일자리 위협받는 현대인... 편의점은 정말 편의를 판매하나

등록 2024.01.10 10:55수정 2024.02.1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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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자료사진). ⓒ 연합뉴스

  
점심식사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갔다.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골라 계산하는 데에는 단 한마디도 필요하지 않았다.


통유리 벽면에 맞붙은 입식 테이블로 가서 삼각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놓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뚜껑을 덮어두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진열대에 걸린 면도기와 칫솔과 스타킹과 우산과 바늘쌈지 따위를 구경했다. 스피커에서는 뉴진스의 신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렸을 적 상상한 '미래의 매점' 

사십 대 중반인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미래 사회에 대해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미래에는 '좁지만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로 채워진 아주 편리한 매점'이 생길 것이라고 귀띔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느 똘똘한 아이가 즉각 손을 들고 그 동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쌍둥이슈퍼와 럭키상회를 거론하며 미래에 대한 선생님의 예견이 그다지 참신한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나는 그 아이가 너무도 옳은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해서 좀 밉상이라고 생각하며 선생님 눈치를 살폈다. 좋아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무안을 당하게 되어 안타까웠다. 그런데 선생님은 뭔가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그 미래의 매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걸어서 고작 십 분이면 가는 쌍둥이슈퍼와 럭키상회가 너무 멀다고 생각해 본 적 없냐고 물으시더니 선생님은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서 미래의 매점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백 미터에 하나 꼴로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백 미터라면 뛰어서 20초도 안 걸리는 거리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선생님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았다. 매점을 선생님 마음대로 그렇게 많이 만들어 버리면 미래가 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미래에는 사람들이 백 미터를 갈 때마다 필요한 게 생각나고 그걸 당장 못 사면 안달할 거란 얘긴데....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처럼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 아이가 우리 반에 최소한 한 명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서서는 의젓한 목소리로 미래의 매점에서는 미래 기술로 만들어진 지금보다 더 싸고 더 좋은 물건을 팔 것이기 때문에 미래 사람들에게도 이롭고 그 수많은 매점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달래듯 말했다. 그래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일 거라고도 했다.

그 희망적인 덕담에 나의 동심이 진정될락 말락 하는데 선생님은 또다시 산통을 깨셨다. 미래에는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여 세상이 아주 바쁘고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미래 사람들은 현재 사람들보다 훨씬 더 피곤할 것이다. 그러므로 싸고 좋은 물건을 고르는 수고를 들이기보다 약간 비싼 값이어도 당장 쓰기 편한 물건을 가까운 데에서 구하려고 할 것이라고 했다.

이쯤 되고 보니 한숨이 나왔다. 국민학생일지언정 바쁘다는 게 뭔지 피곤하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바 아니었건만 미래의 그것들은 뭔가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처럼 들렸다. 미래를 상상하려 들수록 더 깊은 미궁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날 수업 말미에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세상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편리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미래에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데에 투자를 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있었고 허무맹랑한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소리 내어 웃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늘 그 미래는 얼마나 형편없는가

오늘 그 미래의 매점에서 쫓기듯이 서성대며 3분 만에 제공된 그 대단한 편의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그때 선생님이 얼마나 정확하셨고, 상상 이상으로 편리할 거라던 미래는 얼마나 형편없는가!

슬리퍼를 끌며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더부룩한 허기를 느꼈다. 참 이상했다. 식사 시간을 아껴 여분의 에너지나 여분의 시간을 얻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밥 안 먹고도 24시간 일할 수 있는 AI에게 일자리를 위협받는 현대인으로서 그저 '여분, 그 자체'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기분만을 느꼈다.

정말로 편의점에서는 '편의'를 판매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편의점에서 제공받는 편의는 눈부신 미래 기술의 혜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남아도는 인력 시장 속에서 경쟁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다. 그로 인해 만연한 인간 소외 현상과 젊은이들의 무기력을 나는 편의점을 이용할 때마다 짙게 느낀다. 어쩌면 편의점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거추장스럽기만 한 인간적인 허기를 잠시 감추기 위해 들르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후 미래의 매점은 또다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지, 사람들은 더욱더 촌각을 다투며 지금보다도 더 피곤하게 인간성을 감추며 살게 되고 매점의 모습도 그에 발맞추어 변해갈지 몹시 궁금해진다. 
#편의점 #과거 #미래 #사회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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