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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봄' 참군인을 찾아서 대전현충원에 모인 200여명

[후기] 12.12 반란군과 진압군이 함께 잠든 현실 분노... 일본 공영방송 NHK도 취재

등록 2024.01.15 09:46수정 2024.01.1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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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3일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서울의봄 특집 '참군인을 찾아서' 현충원투어 모습. ⓒ 서영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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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3일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서울의봄 특집 '참군인을 찾아서' 현충원투어 모습. ⓒ 서영석 작가

   
"어디서 온 단체냐?"
"단체가 아니다.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알아서 모인 분들이다."

"몇 명이 오는 거냐?"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청은 220명이 했다. 지금 봐서는 150명은 확실히 넘게 올 것 같다."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많이 오는 거냐? 대체 뭘 보고 모인 거냐?"
"영화 <서울의봄>을 본 뒤, SNS에 올린 공지 보고 알아서들 온 거다. 걱정하지 마시라. 지사들과 참군인에게 조용히 인사만 올리고 갈 거다."


지난 13일 오전 10시 55분께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현충원 직원과 나눈 대화입니다. 현충문 앞에 200명에 가까운 시민이 몰려들자, 투어를 준비하던 제게 다가와 여러 질문을 했던 겁니다. 이날 실제로 오전 11시 기준 150여 명이 모였습니다. 투어 중간에 오간 사람들을 포함하면 족히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함께 걸음을 이었을 겁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날 기준 1300만 명 가까이 본 영화 <서울의 봄>의 실제 주인공들이 어디에 잠들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2018년 말부터 <임정로드>와 <약산로드> 등의 책을 내면서 현충원에 잠든 친일파와 독립군을 찾아 30회 이상 공익목적의 현충원 투어를 무료로 진행해 왔습니다. 과정에서 12.12반란에 맞섰던 김오랑, 정병주, 정선엽, 김진기, 윤흥기, 안종훈 등 참군인을 알게 됐고,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이들을 찾아 나서는 투어를 병행하게 된 겁니다. 이날 투어는 35번째였습니다.

12.12 반란 진압 위해 병력 이끈 윤흥기, 고소장 초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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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2묘역 윤흥기 장군 묘. 바로 뒤에 12.12 반란에 참여했던 김윤호 장군의 묘가 있다. ⓒ 김종훈

 
이날 '참군인을 찾아서' 투어는 정확히 5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1부는 항일과 친일을 주제로 독립유공자 묘역에 잠든 애국지사들을 찾아 인사 올렸고, 2부는 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선엽과 12.12 반란에 나섰거나 무기력했거나 맞섰던 이들의 묘 앞에 섰습니다. 

12.12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 보안사 대공처장 남웅종,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보병 20사단장 박준병, 9공수 여단장 윤흥기, 보병학교장 김윤호, 30사단 연대장 송응섭, 수방사령관 장태완, 보안사 보안처장 정도영, 606부대장 김택수, 수경사 참모장 김기택,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경호실장 직무대행 정동호, 헌병감 김진기 순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오직 3인 장태완, 김진기, 윤흥기만이 반란에 직접 맞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들 3인 중에서도 유일하게 병력을 직접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 인물이 있으니, 장군2묘역 255번 무덤에 안장된 윤흥기 여단장입니다. 

윤 여단장의 묘에는 "올곧은 참군인 여기 잠들다"라고 적혔습니다. 2013년 8월 17일 눈을 감은 뒤 남은 가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묘비에 새긴 말입니다. '참군인', 가족들이 남긴 말처럼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군인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1979년 12.12 당시 그는 수도권 특전여단장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회 소속이 아닌 갑종 출신으로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실제 서울로 향하는 하나회 소속 육사 12기 박희도의 1공수를 저지하기 위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병력을 이끌고 나섭니다. 그러나 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향하던 중 영화에서처럼 윤 여단장은 당시 육군본부를 지휘하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회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윤성민 차장은 반란군으로부터 '서로의 병력을 물리자'는 신사협정을 제안받습니다. 그러나 신사협정은 반란군의 기만 작전에 불과했고, 윤 여단장이 윤 차장의 명령을 받고 병력을 물린 사이 반란군 세력인 1공수여단이 서울로 진입해 육본 지휘부를 장악하고 종국에는 반란까지 성공하게 됩니다. 

12.12 반란 직후 윤흥기 여단장은 자신의 자리를 하나회 출신인 이진삼(육사15기)에게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이후 윤 여단장은 장태완, 정병주처럼 강제예편 당하지는 않았지만 실권이 약한 한직만 돌다 1983년 30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게 됩니다. 그리고 2013년 윤 여단장이 눈을 감기 직전 <오마이뉴스>와 만난 마지막 자리에서 그의 부인은 말합니다. 

"우리 영감님이 12.12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게 전두환 대통령 눈에 들지 않았겠죠. 집에 와선 통 밖에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는데, 강제로 전역을 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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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기 장군 견장 달아주는 노태우 제9공수여단장에 취임하는 윤흥기 준장, 오른쪽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왼쪽이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준장이 윤 준장에게 지휘관 견장을 달아 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반란군을 막지 못하고, 반강제로 군을 떠나야 했던 상황에서 윤 여단장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우리 사회에 법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반란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생동안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란죄 공소시효가 15년이라는 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인 1993년 7월 정승화 대장을 비롯해 12.12 당시 육본의 정식지휘 계통 아래 있었던 장군 22명을 규합,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하는 성과를 냅니다. 고소장 초안을 윤 여단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늦장을 부리던 검찰은 1994년 10월에야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행위로 새로운 헌법질서를 만드는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12.12 반란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듬해인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반란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해 7월 검찰은 다시 한번 '공소권이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립니다.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게 된 겁니다.

두 번 연속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검찰의 행태에 국민 여론은 폭발했습니다. 당시 5.18관련 단체들은 상경시위를 이어가며 범국민청원운동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이 같은 결정에 크게 항의하며 동조했습니다. 이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재수사를 강력히 지시했고, 결국 국회는 12.12반란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제야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재수사를 결정했고 전두환과 노태우 등 12.12 및 5.18 관련자를 구속기소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22년 6개월형을 내립니다. 재판부는 12.12에 대해 명백한 반란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삶의 목적은 오직 쿠데타 주역을 법정에 세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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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12.12 쿠데타 주역들이 보안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오마이뉴스 재편집

 
애석하게도 윤 여단장이 남긴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자서전을 준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간간 언론에 남긴 짧은 인터뷰가 전부입니다. 1993년 머리를 다쳐 뇌수술 후 요양 중이던 상황에서 윤 여단장은 언론을 만나 자신이 당시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헌법·군형법상 12.12주역들은 모두 단죄할 대상자들이다. 실정법을 어긴 범죄자들을 마땅히 다스려야 다시는 일부 정치군인이 군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는 짓을 못할 것이다. 1994년 12월 12일이면 시효가 만료되므로 그전까지 쿠데타 주역을 법정에 세우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결국 역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12.12반란 세력 중 일부를 법정에 세우고 법의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12.12 반란군에 합류했던 모두가 그런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당장 그의 묘 바로 뒤에도 12.12 당시 보병학교장을 역임하며 반란에 참여했던 김윤호가 바로 뒤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윤호는 12.12 반란이 일어나자 수뇌부였던 황영시의 요청을 받아 다음날인 12월 13일 새벽 상경해 신군부 세력에 합류합니다. 그가 신군부에 합류한 목적은 미국을 상대로 전방부대를 빼서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던 것. 주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던 김윤호는 영어가 능통했고, 미군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2.12 반란 후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군사반란을 변호하고 신군부의 정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안심시킨 겁니다. 

미국과의 교섭에 성공한 김윤호는 공로를 인정받아 황영시의 뒤를 이어 3성 장군으로 진급하고 1군단장이 됩니다. 이후엔 대장으로도 진급해 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역임합니다. 군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것인데, 예편 후엔 대한석탄공사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도 맡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윤 여단장 바로 뒤에 잠들게 됩니다. 그의 묘에는 '평생을 위국헌신하신 청렴 강직한 군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새겨졌습니다.

이날 현충원투어 현장에는 일본 공영방송인 NHK가 취재를 나왔습니다. 5시간 넘게 이어진 투어를 열심히 쫓으며 취재하고 참석한 시민들을 인터뷰 했습니다. 투어 해설을 마친 제게 마지막에 묻더라고요.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이냐?' 웃으며 답했습니다. '반란에 맞섰던 참군인이 어디에 잠들었는지, 이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제대로 알고 술 한잔이라도 직접 올리기 위해 그러지 않얐겠냐'라고.

112개 팀, 220여 명이 신청한 현충원투어는 종료됐습니다. 그러나 친일파와 독립투사, 참군인과 반란군이 함께 잠든 부당한 현실이 바뀔 때까지는 이 투어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날이 따뜻해지는 3.1절 어간에 다시 한번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한파에도 걸음 이어준 여러 시민과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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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군인 윤흥기 장군 묘 ⓒ 권택상

 
#현충원 #서울의봄 #윤흥기 #장태완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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