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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31일 국보위 임명장 받으러 간 날, 집권계획 감 잡았다"

[단독]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진정서' 전문 공개②

등록 2024.01.23 11:17수정 2024.01.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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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을 악수로 환송하고 있다(1980. 8.). ⓒ 국가기록원


'10.26, 12.12, 5.31, 1.15, 2.25, 3.3...'

전두환, 노태우 등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모태로 한 신군부세력은 10.26사건과 12.12 쿠데타, 5.18 광주학살을 거쳐 5월 31일 임시행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국보위 출범 8개월 만인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했고, 비상계엄 해제(1월 24일) 한달 뒤인 2월 25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 민정당 총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취임은 3월 3일). 쿠데타를 일으킨 지 불과 1년 2개월여 만에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군부의 '집권시나리오'가 사전에 마련됐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신군부의 핵심인사인 정호용 전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사령관은 "1980년 2월부터 정당 창당을 시도했고,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집권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감을 잡았다"라고 증언했다. 정 전 사령관이 지난 2021년 2월과 3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5.18진상조사위, 위원장 송선태)에 제출한 두 건의 진정서를 통해서다. 12.12쿠데타의 목적이 '권력 찬탈'에 있었음을 신군부의 핵심인사가 증언한 것이다. 

[전문]
- "전두환이 5.18에 사과 안 하면 혼자라도 하겠다" https://omn.kr/273da
"전두환 1980년 2월 창당 시도, 명확한 사실" https://omn.kr/273db

"5공 핵심 '쓰리허'한테 배척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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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지난 2021년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태우씨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정호용 전 사령관은 지난 2021년 2월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자신이 '5.18 책임자'로 지목된 경위를 해명했다. 그는 '본인이 광주사태 주동자로 지목된 경위 해명'이라는 항목에서 "본인은 집권시나리오와 정국수습방안에 대해 전두환 장군이나 허씨들(허화평, 허삼수, 허문도)로부터 들은 바도 없고 그들이 보기에 (본인은) 비협조자였다"라며 "본인은 정치 참여나 권력욕이 없었을 뿐더러 상급자에게 아부하거나 권력이나 힘을 과시하는 부하들을 혼내주는 편이어서 5공 핵심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는 사이가 나쁜 관계로 배척(왕따)을 당하고 있던 자"라고 설명했다. 

정 전 사령관은 12.12 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에 대한 발포, 김오랑 소령 부대장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 정당 창당 자금 모금, 언론통폐합법 등과 관련해서 5공 실세였던 '쓰리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 끊임없이 갈등했다고 털어놓았다.   

정 전 사령관은 "50사단장이라는 한직에 근무하면서 10.26사건과 12.12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며 "1979년 12월 13일 특전사령관직에 보직되어 전날 저녁 (정병주 사령관과 김오랑 소령에 대한) 최세창 장군(제3여단장)의 발포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고 김오랑 소령 장례를 부대장으로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시킨 것으로 인해 5공 핵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정 전 사령관은 "1980년 2월 전두환 장군 요청으로 정당 창당 자금 모금과 관련하여 허화평 대령으로부터 극심한 수모를 당한 사실이 있다"라며 "또한 1980년 4월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주도한 언론통폐합법을 반대하여 이 법 통과를 11월로 미루는 결과를 초래하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모욕적인 비난을 받은 사실이 있다"라고 거듭 '쓰리허'와의 갈등관계를 설명했다. 

"1980년 2월부터 정당 창당을 시도한 것은 명확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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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이윤기

 
특히 정 전 사령관은 2021년 3월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추가 진정서에서 민정당 창당 자금 모금, 언론통폐합법과 관련된 '쓰리허와의 갈등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추가 진정서에 따르면, 1980년 2월 초 정 전 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참모들이 정당 창당을 하려는 모양인데 어디서 자금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라고 요청받았다. 이후 그로부터 지시를 받은 김충립 특전사 보안반장은 '박보희(통일교) 100억 원, 조내벽(라이프주택) 50억 원, 박성철(신원통상) 30억 원' 등 총 180억 원의 헌급 약속을 얻어냈다. 

김충립 반장은 정 전 사령관에게 이러한 '180억 원 헌금 약속' 메모를 전달하면서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대령)에게는 절대 전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가 이것을 허화평 실장에게 전달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허화평 실장이 통일교의 2인자인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10시 이전에 한국에서 떠나라, 그 시간 이후에 체포하겠다, 죄목은 정치자금법 위반이고, 조사에 따라 반국가음모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라고 통보했고, 결국 박보희 총재가 미국으로 강제출국을 당한 것이다.  

정 전 사령관은 "허화평 대령은 나에게 창당한다는 정보가 알려진 것을 두려워하고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라며 "결국 정치자금을 낼 용의가 있던 한 사람은 강제출국을 당했고, 이 일을 주선했던 나는 허화평 대령에 의해 수모를 당했지만, 1980년 2월 정당 창당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명확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이후로 창당 자금건은 잠잠해졌고 실제 창당은 1980년 9월에 시작되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정 전 사령관은 추가 진정서에서 "(1980년) 4월 중순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언론통폐합법을 브리핑하기에 '잘못된 것 같다, 김충립 소령과 새로운 법을 만들어보라'고 한 사실이 있으나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같은 비난을 듣게 되어 매우 불쾌했다"라고 전했다 

물론 정 전 사령관이 '쓰리허'와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참여나 권력욕이 없었다"라는 주장은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내무부·국방부 장관, 13대 국회의원 등 5공과 6공에서 승승장구한 그의 행적을 헤아리면 '궤변'이라고 할 수밖에 있다. 

"5공 집권시나리오, 정국수습방안에 참여한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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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여름 전두환. '쓰리스타'로 진급해 보안사와 정보부를 장악했다. ⓒ 김충식 제공

 
이어 정호용 전 사령관은 "상기 네 가지 이유로 입장이 난처해진 본인은 5월 광주사건이 발생하자 허씨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어 작전임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사령부에 대기하게 되었던 바 김충립 보안반장이 사령부 장석규 대전복과장에게 부탁하여 광주에 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 전 사령관은 "따라서 본인은 5공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방안 연구에 참여한 일이 없으며,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으로부터 돌아가는 분위기를 청취하고 있었으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며 "전두환 장군이 본인에게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방안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세 허씨들이 본인과 불편한 내색을 보이는 등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확정했고, 같은 날 저녁 9시 40분 임시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없이 단 8분 만에 가결됐다. 이보다 몇 달 앞서 보안사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비상계엄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국보위)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시국수습방안'이라고 하지만 '신군부집권시나리오'였다. 이후 국보위 출범, 민정당 창당, 전두환 대통령 선출 등이 이어졌다. 

정 전 사령관은 "본인은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으러 오라 해서 참석한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집권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감을 잡았을 정도였다"라며 "그런데 (5.18) 주동자로 몰린 것은 현지 지휘관(소준열 전투병과교육사령관 등)이나 작전참모(장세동)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본인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사령관은 추가 진정서에서 "본인은 광주사건이 매듭지어지고 5월 31일 국보위가 설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라며 "국보위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5월 31일 당일 임명장을 받으러 가서 '국보위가 무엇하는 것이냐'고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본 사실이 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 '3당합당'을 위해 국회의원직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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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1일 서명한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김원기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의 합의각서. ⓒ 오마이뉴스

 
특히 정 전 사령관은 자신을 '5.18 책임자'로 몰고간 인사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그는 "(내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5.18 책임자가 된 것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윤환 의원(민정당 원내총무)이 3당 통합을 위해 꾸민 정치적 모함에 의해서였다"라며 "이때부터 5.18의 원흉이 되었고 1996년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죄를 저지른 것으로 처벌받는 것이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전 사령관은 "여소야대 정국이 되자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추진하면서 야당 총재들에게 '군사문화를 청산하겠다', 즉 '다음 대통령에 군 출신인 정호용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한 후 김윤환 총무가 위 내용을 적시한 서류를 작성하여 야당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광주사건 청문회을 통하여 정호용 국회의원을 영원히 정계에서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위의 언급한 서류는 1989년 3월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김원기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간에 이루어진 합의각서를 가리킨다. A4용지 6장 분량의 이 합의각서에는 5공 청산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문제 처리, 1980년 언론통폐합과 해직 관계자 처리, 전직 대통령 증언 문제 처리, 민주화문제, 지방자치제 실시, 공무원 노조 결성 협의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5공 청산과 5.18문제 처리 항목에는 5.18특별법 제정, 정호용 국회의원직 사퇴, 이희성 공개사과문 발표, 전두환의 대국민사과, 이원조 공직 사퇴 등이 포함돼 있다.  

정 전 사령관은 "이런 각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노 대통령은 '당신이 무슨 죄가 있느냐?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라며 "김윤환 총무에게 항의했더니 자신은 그런 서류에 서명한 일이 없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청문회가 시작되자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보다 더 심하게 공격해왔고 정웅 의원이 거들어서 본인이 5.18의 책임자가 되었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 주면 3당 통합이 된다, 앞으로 3년간 국정운영이 원활히 되도록 희생해 달라'고 부탁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5.18 책임자가 되었으나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약속은 헛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 전 사령관은 1988년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대구시 서구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5공 비리와 5.18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사퇴 요구가 거세지자 1990년 1월 사퇴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을 전격 발표했다.  

"혼자라도 망월동 묘지 참배하고 명복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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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전 사령관의 특전사령관 시절 사진 ⓒ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 제공

 
한편 정 전 사령관은 진정서 말미에 "본인은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사과해야 할 입장도 못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끝내 사과하지 않는다면 본인 혼자라도 합당한 수준의 사과를 할 뜻을 가지고 있다"라며 "가능하다면 도와주기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정 전 사령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두 차례 걸쳐 (5.18에 대해) 사과할 것을 간언한 바 있으나 지금은 다 허사가 된 것 같다"라며 "가능하다면 저 혼자라도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여 명복을 빌고 국민대통합에 기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장세동은 5·18 수일 전에 왜 광주에 내려갔을까?" http://bit.ly/99vsxi
"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 http://bit.ly/dsudg4
[단독] 드디어 입 연 정호용 "노태우가 날 5.18 책임자로 몰아 제거" https://omn.kr/1t84i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 5.18 작전지휘에서 벗어나 있었다" https://omn.kr/1yxvi
[추적]"5.18 수일 전 광주 간 장세동, '마침내 일 다 끝냈다'고 전화" https://omn.kr/1yz0r
정호용 전 사령관, 5.18 관련 답변서 제출.. 대면조사는 '불응' https://omn.kr/1zifd
[단독] "5.18 당시 광주 간 장세동, '전두환 분신' 평가 받았다" https://omn.kr/1zl5h
[단독] 신군부 5.18 '헬기 사격' 부인했지만.."허삼수는 '헬기 작전' 말했다" https://omn.kr/1zlsi
 
#정호용 #5공 #전두환 #민정당 #쓰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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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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