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내가 더 아름다운 이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등록 2024.01.29 09:05수정 2024.01.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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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내가 더 아름다운 이유'

그렇게 써 두었다. 나의 잡상노트에.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책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놓은 기록이니 시간으로 따지면 골동품이 된 기록이다. 그 시절 <데미안>을 처음 읽고 나는 꽤 감동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한 선생님께서 <데미안> 같은 책은 꼭 읽어 봐야 한다고, 숙제 아닌 방학 숙제를 내주셨다. 지적 허영에 사로잡힌 나의 치기가 5할, 선생님의 가르침이 진리라 믿었던 순진함이 5할, 높은 열의를 갖고 책을 잡았다.


책 읽기를 마치고 나서 나는 헤세의 팬이 되었다.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인상 깊은 몇몇 구절을 공책에 적고 의미를 새겼다. 그 중,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거야. - 피스토리우스' 같은 말은 내 정신의 책장에도 기록되었고 종종 저절로 펼쳐져 눈앞에 나타났다. 한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라는 말의 뜻은 내내 깨닫지 못했다.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로 느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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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데미안> ⓒ 민음사


이후로 오랫동안 이 책을 찾지 않았다. 성장소설 혹은 청소년 필독도서라 이름 붙인 까닭이다. 수십 년이 흘러 중년이 된 나는 작년과 올해 <데미안>을 연달아 세 번 읽었고 비로소 깊은 몰입을 경험했다.

많은 상징과 환상적인 장면들이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성인으로 성장하며 겪는 내면의 갈등이 주요 줄거리라고 자전적 성장 소설 쯤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던 서문을 반복해서 읽으며 나는 싱클레어, 아니 헤세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듯했다.

서문에서 헤세는 자기 자신의 유년시절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며,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근원을 회상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작품을 발표할 때, 헤세는 자신의 이름 대신 주인공인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두 페이지 남짓한 서문에 그가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서문의 시작은 이렇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렇다. 우리는 모두 살아간다. 성경에 그러한 말이 있던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었다는. 헤세가 인간을 두고 '자연이 던진 돌'이란 표현은 거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우리네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고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헤세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힘들게 겪고 있는 삶에 대해 보이지 않는 위로를 하려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란 가공의 인물을 써 내려가선 안 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말 또한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헤세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것을 오솔길에 비유한다. 오솔길은 남이 닦아 놓은 대로가 아니라, 미지의 길 그리고 새로운 길이다. 그래서 어둡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라는 구절은 자아의 깨달음에 대한 상징이다. 알을 깨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면서 그와 동시에 한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과도 같다.


싱클레어의 유년은 세계가 두 양극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어둠의 세계에 묘한 끌림을 받는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아이는 싱클레어에게 시련을 주지만 데미안이 그를 도와준다. 그리고 데미안과의 대화를 통해 낯선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잠시 동안 데미안과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만 그에게 영향을 주는 다른 인물들을 만난다. 그와 함께 술과 향락을 즐긴 알폰소나 순수한 연정의 마음을 갖게 한 베아트리체, 크나우어처럼 싱클레어를 우상으로 여긴 인물도 있었다.

유년 시절에 데미안과의 대화가 그를 인도했다면, 청소년기에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가 있었다. 싱클레어는 '생각이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는 데미안의 말을 조금씩 실천하며, 알 껍데기를 부수고 나온다.

싱클레어에 나오는 이 모든 인물들은 그의 분신들로 여겨진다. 데미안도 그렇지만 특히 에바 부인은 매우 신비로운 분위기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보이면서도 어려 보이고 여성성과 남성성을 두루 갖추었다. 싱클레어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가가기 힘든, 운명이자 악마라고 표현한다.

그 외 어떤 부분들도 다소 환상적이고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 쪽지로 데미안의 답장을 받은 일이나, 싱클레어가 그린 이상형의 그림이 알고 보니 데미안을 닮았고 결국은 에바 부인을 쏙 빼닮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헤세가 의도한 장치인지 모르겠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 우리의 현실이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의 세계를 발현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인 이유가 이것이다. 헤세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싱클레어가 찾아가는 자기 자신을 상징적인 인물로 구현하여 현실에서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성장은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절정에 이른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그녀는 '성취'였다. 그녀는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자, 이상을 함께하는 연대자이자, 존경과 숭배의 대상인 여신이기도 했다. 싱클레어는 전장터에서 에바 부인이 여신인 채로의 환영을 보고, 그녀의 고통이 터뜨리는 총탄에 부상을 입는다.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나는 상상으로만 그치지만, 전쟁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야겠다. 개인의 관점에서 전쟁은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근대 이래 인본주의가 팽배하였고 인간 생명은 존엄성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순식간에 개인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전쟁의 목적은 전적으로 정치적이며 개인은 도구로 전락한다.

헤세는 에바 부인의 입을 통해 '그러나 어느 꿈이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고, 어느 꿈이든 새로운 꿈으로 교체된다. 그러니 어떤 꿈이든 집착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과도하게 한 신념에 사로잡혀 그 신념을 자신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경우가 있다. 에바 부인의 환영은 꿈 하나에 지배당하는 듯 했고,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신념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그의 메시지가 아닐까?

야전병원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에바부인이 전하기도 하는 입맞춤을 전해 주고 떠난다. 그리고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 있다.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일은 시대 불변이자 보편적인 인류의 운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세가 살았던 당대의 유럽 사회에는 그 길이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제국주의와 산업화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울함을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총알 하나에 종잇조각처럼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나는 그려보고 싶지 않다.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조용한 응원을 보내게 된 이유이다.

헤세가 남긴 서문의 마지막은 이렇다.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기에 우리는 형제다.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각자 다르다. 삶의 의미의 해석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는 큰 차이'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내가 더 아름다운 이유이다. 그리고 싱클레어, 아니 헤세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자기 자신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의 길이 의미있는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와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0


#헤르만헤세 #데미안 #독서 #자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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