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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브로카실어증 환자들과의 따뜻한 기억들

등록 2024.02.05 14:31수정 2024.02.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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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재활사의 말 이야기'는 15년 넘게 언어재활사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로, 언어치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편집자말]
"으...음...내가...마..말....자...잘...안나..."
(의미 : "내가 말이 잘 안 나와서 불편해요")


시종일관 말을 하다가 마는 이 환자는 브로카실어증 환자이다. 말을 꺼내기도 어렵거니와 말을 이어나가기도 어렵다. 브로카실어증은 비유창성(말을 하거나 글을 읽는 것이 유창하지 못한) 실어증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어려운 브로카실어증은 구사하는 발화 길이가 짧고, 전보문식 구어(telegraphic speech : 명사나 동사 위주의 표현으로 조사와 기능성, 문법형태소 등을 생략한 표현)로 표현한다. 그래서 "내가 말이 잘 안 나와서 불편해요"라고 하고 싶을 때 위의 말처럼 뜨문뜨문 끊어서 말하는 것이다.

청각적 이해력이나 문장 독해력이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길고 복잡한 문장 구조 이해는 어렵다. 그래서 치료사를 괴롭히는 경우는 드물고, 반대로 치료 시에 자신의 상태에 직면하면서 괴로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보자면 이렇다.

에피소드 1.

예전에 내가 한창 피곤한 상태로 누가 봐도 힘든 몰골이었을 때가 있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눈도 퀭하고, 피곤하구나, 아프겠다 싶은 상태랄까? 그때 내 환자 중 브로카실어증이었던 젊은 여자 환자가 한 명 있었다. 

한눈에 봐도 참 예쁜 사람이었는데 성형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병 전부터 미모,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관심은 자신뿐만 아니고 주변인들에게도 있었을 거고, 실어증 상태였지만 생각이나 감정은 그대로이니까 주변인이자 관심의 대상인 나를 본 그녀에게 그날의 나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봐주기 힘든 몰골이었던 게 분명하다. 환자분이 내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입... 아파..." 아, 내 입술에 물집이 잡힌 걸 보고 말씀하시는구나 싶어서 "아~ 괜찮아요. 요즘 제가 안 하던 공부를 좀 하니 피곤해서 그런 거 같아요"라고 그렇게 대답했더니, 그녀는 제스처를 이용해서 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너무 리얼하게 설명을 잘 표현하는 그녀의 제스처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싶다. 봐야지 느낌이 딱 올텐데...).

그걸 말로 설명해보자면 그녀의 제스처는 이랬다. 양쪽 검지를 펴서 얼굴에 가로로 놓고 눈 밑으로 내려 당기는 거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짧은 말, 

"밑에....밑에...음...............(가벼운 고개 젓기를 하며) 까매.."

아... 그랬다. 그녀는 내가 아파서 울고 있다라고 표현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다크서클에 관해, 봐주기 힘든 몰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내 다크서클이 이리 심각했구나.

그녀는 브로카실어증이기 때문에 내용어 중심의 표현을 하고, 짧은 표현의 제한적인 발화 수준을 보인다.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백 퍼센트 말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말뿐만 아니라 행동, 감정 등이 동시에 모두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게 해준다. 그래서 브로카실어증 환자들이 이렇게만 표현해도 치료사도 주변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소통이 된다. 세계 만국 공통어가 보디랭귀지라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진짜인 셈.

아무튼, 그녀의 말과 제스처를 대략 이런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로 내게 표현한 것이리라. 내가 대신 그녀의 말을 정리 해보면, '당신의 입술이 부르터졌고, 눈 밑 다크서클은 입 주변 언저리까지 내려가 있을 정도로 심각해서 걱정이 된다' 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치료시간에는 꼭 예쁘게 화장을 하고 그녀를 맞이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에피소드 2.

또 다른 브로카실어증 환자와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경상도 사나이라서 본디 말 수가 적고 무뚝뚝했다고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다르지 않는가. 지금은 표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브로카실어증 상태인 것, 그의 표현의 수준은 대략 이랬다.

"아.... 오...오오늘.......................... 어................어려워요" 같은 정도. 브로카실어증이 표현할 때 말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같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기도, 글쓰기도, 읽기도 모두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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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쓴 '사랑'이라는 단어 ⓒ 황명화

 
물론 저때의 그도 그랬고 말이다. 다행히도 그는 차도가 있고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저 날은 단어 수준의 글자들을 조금씩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치료를 마무리하려고 내가 "오늘 여기까지 할게요~" 하자, 그는 몸짓으로 쓰던 종이를 잠깐 달라는 시늉을 했다. '왜 그러시지?' 의아해하며 종이를 드렸더니 이렇게 적어주고 가셨다. '사랑'. 오~ 서윗해라(스윗하다, 달콤하다는 뜻희 경상도 사투리 버전) 이런 뜬금없는 고백이라니!

이 대목에서 치료사인 내가 받은 감동은 어디서 오는지 갑자기 헷갈린다. 환자가 자신이 '생각한 단어를 썼다'라는 게 감동의 포인트인지, 아니면 하고 많은 단어 중 '사랑'이라는 저 단어를 고르신 게 감동의 포인트인지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말로 무뚝뚝한 치료사 같으니라고...

이렇게 브로카실어증 환자와 좀 더 따뜻한 기억이 많은 것은 어쩌면 '소통'의 가능성 때문일 것 같다. 의사소통은 단순히 말로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로하는 표현에 제스처나 말하는 이의 감정, 뉘앙스 등이 다 포함된다.

가령 '잘했다'라는 단어가 긍정적 의미에서는 칭찬, 응원의 의미겠지만, 부정적 의미에서는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하는 비아냥거리는 말로 볼 수 있듯 말이다. 그래서 브로카실어증환자들은 구어(speech,말)적 표현이 서툴지만 들으려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고, 이로써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 타인이나 상대를 탓하는 경우가 적어 화도 덜 내고, 치료에도 더 협조적이다.

협조를 잘 해 주니 소통이 좀 더 원활해지고, 환자들의 비유창성부분이 개선되면 치료 결과도 더 효과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치료사 입장에서 환자와 소통이 되는 긍정적 경험과 예후적인 면에서도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환자 본인은 말을 잘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있으며, 잘 안 되는 상황들을 직면해야 하고, 수정해 보려 해도 맘대로 되지 않아 갑절로 더 힘들 거다. 

이럴 때 보면 세상은 참 공평하지 못하다. 브로카실어증들이 부디 마음 덜 다치고, 조금 천천히라도 더 자주 표현하고 말하게 되기를,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치료사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윗글은 제 블로그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브로카실어증 #마음 #실어증 #비유창성실어증 #전보문식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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