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사무실 구하는 데만 반년...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진화위' 만들것"

[인터뷰] 유해정 초대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 "피해자 권리매뉴얼 필요"

등록 2024.02.13 06:58수정 2024.02.14 10:06
0
원고료로 응원
a

지난 2일 서울 중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유해정 센터장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복건우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함하는 재난의 진상규명 기구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권위주의 시대 국가폭력 사건을 다루는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처럼요."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계속 전화를 받아야 했다. 개소 이틀 뒤인 지난 2일 서울 중구 소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에서 만난 유해정 초대 센터장은 이른 아침부터 재난 피해자들의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우리함께'는 "국내 첫 재난 피해자 권리 증진 기구"를 표방하며 만들어졌다. 세월호 참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4.16재단의 부설기구지만 센터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모든 재난을 아우르고자 한다. 유 센터장은 "진상규명 기구"와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재난 조력 모델"을 제시했다. 

"재난이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재난이 벌어진다면 참사 피해자 단체로 이뤄진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가장 먼저 현장에 가서 피해자들을 조력하는 모델을 고민하고 있어요. 단순히 연대 차원이 아니라 법과 제도로 명문화된 지위·권한을 갖고 현장에 개입하도록 말이에요. 실제 프랑스에 '대형사고 피해자들의 체계적 보살핌 지침'이란 상징적 사례가 있죠. 재난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단체가 재난 현장을 조사할 권한, 정부 브리핑을 같이 들을 권한, 피해자들을 법률 대리인처럼 조력할 권한을 갖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어요. 

진화위 같은 진상규명 기구도 필요해요. 진화위가 사건을 조사해 진상규명 결정문을 내놓으면 피해자들은 재판 등으로 법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잖아요. 재난 피해자들도 이런 절차를 밟을 수 있어야 해요. 한국에서 발생한 재난 가운데 피해자들이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참사는 하나도 없어요. 세월호 참사, 삼풍백화점 참사가 왜 사고가 아닌 참사가 됐는지 그 구체적인 맥락을 제대로 조사하고 진실을 물을 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 해요."


인권기록활동가인 유 센터장은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으로 활동하며 유가족·생존자의 구술 기록집 <금요일엔 돌아오렴>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등을 펴냈다. 유 센터장과 나눈 대화를 아래에 정리했다. 

갈등에도 '함께' 택한 재난 피해자들
 
a

서울 중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 뒤쪽에 붙은 센터 소개글. ⓒ 복건우

 
a

지난 1월 31일 저녁,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 증진을 위해 국내 최초로 설립된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개소식이 열렸다. ⓒ 복건우

 


- 초대 센터장을 맡게 된 소감은.

"마음이 많이 무거워요. 센터가 만들어지기까지 재난 피해자 가족들이 거쳐 온 수많은 갈등과 상처, 다독거림을 아는 사람으로서 센터장이라는 자리가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해요."

- 갈등과 다독거림이라고 하면?

"세월호 가족들은 아직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다른 재난 피해자들을 추모한다는 게 지나친 오지랖 같다고, 분수와 형편에 맞지 않는 행동 같다고 느끼셨어요. 이성적으로는 센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감정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괴리와 갈등이 있으셨던 거죠. 저는 4·16재단이 만들어질 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수많은 재난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번에도 재단 관계자들이 가족들을 만나 끊임없이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고 진심을 보여주는 과정이 있었어요. 가족들이 너른 품을 내어주신 만큼 제가 가교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죠."

- 개소식에서도 계속 떨린다고 했다. 

"한 분 한 분 소개하는 것조차 너무 긴장되더라고요. 일례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가족과 소방공무원노조를 차례로 소개했어요. 제천 참사의 피해가 커진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구조·수색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이것이 소방노조에 대한 비난으로 다가가지 않길 바랐어요. 그 소방대원들은 이태원 참사 때 최선을 다해 구조 활동을 했음에도 가장 먼저 처벌의 대상이 됐다는 안타까움이 또 있거든요. 이렇게 묘한 긴장감 사이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 떨렸던 것 같아요."

- 사무실 얻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사무실 찾는 데만 반년이 걸렸다는 얘기가 있어요(웃음). 원래는 전국에서 재난 피해자들이 편하게 오실 수 있도록 서울역 근처를 알아봤어요. 처음 물색한 사무실 몇 곳과 얘기가 잘 되는 듯하다가, 서류를 딱 보내는 순간 전부 안 된다며 거절을 당했어요. 재단 이름 앞에 4·16이 붙었으니 매일 시위하러 오는 것 아니냐, 경찰들이 건물 앞에 서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우려들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몇 곳을 더 전전하다가 여기 충무로로 오게 됐어요."  

"피해자 '권리 매뉴얼' 만들 것"
 
a

지난 2일 서울 중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유해정 센터장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1995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1999년),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1999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2003년), 가습기살균제 참사(2011년),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2013년), 세월호 참사(2014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2017년) 등 한국 재난 참사를 설명한 글들을 보여주고 있다. ⓒ 복건우

 

-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데 센터장을 맡기까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맞아요. 저는 센터가 재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자리였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재난을 둘러싼 기록은 정부의 일방적인 공보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증언으로만 이뤄졌어요. 새로운 이야기는 공보와 증언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 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기자들이 국가를 향해 '정부는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기록자가 피해자에게 '참사 이후 당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라고 물을 때 비로소 생겨나요. 센터를 찾아오는 시민들, 연구자들,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피해자의 증언이 퍼지고 또 그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갈 때 재난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뀔 수 있다고 믿어요. 그것이 이야기를 듣는 인권활동가와 센터장 사이의 접점인 것 같아요."

- 센터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참사로 수백 명이 죽어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더 많잖아', '놀러 가서 죽은 게 뭐 자랑이야' 같은 반응이 나와요. 또 피해자의 증언에만 기대면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본인의 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피해자 탓을 하게 돼요. 세월호 침몰 장면, 유가족이 정부에 투쟁하는 장면으로만 참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피해자를 만나 이야기한 경험, 웃었던 경험, 따뜻한 음식을 나눴던 경험, 자기 삶의 무언가를 바꾸게 된 경험을 센터에서 함께 만들 수 있었으면 해요.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법과 제도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1월 31일 개소식에서 나눠준 책자에는 센터의 주요 사업들이 소개돼 있었다. 재난 피해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분야의 전문인력을 연결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4·16 긴급지원기금', 재난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도울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재난안전 전문가 양성', 재난 피해자 권리 증진을 위한 '권리 매뉴얼 발간' 등이 대표적이다.

- 권리라는 말이 좀 추상적인데, 센터의 구체적인 과제는?

"우선 '권리 매뉴얼'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가령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자식이 죽기 전에 어디서 발견됐고 어떻게 병원으로 옮겨졌는지 알고 싶어해요. 국가로부터 구조 수색 일지를 받아보고, 변사 사건 종결서를 받아보고, 부검 보고서를 받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각 단계별로 누구에게 어떤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지, 근거 법률은 무엇인지 체크리스트로 파악할 수 있게끔 매뉴얼을 만들고 싶어요."

- 초대 센터장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센터가 잘 안착하면 머지않아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같은 재난 피해자들, 특히 형제자매와 생존자가 센터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 청년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무한히 넓어져야 하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어요. 앞으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고, 회사에 다니고, 거기서 또 여러 관계들을 맺을 텐데, 재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이들의 세계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재난은 끔찍하고 참담해서 어둡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손으로 센터가 운영되면 좀 더 다른 색채의 기억과 추모, 법과 제도가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해요."

재난참사를 향한 날선 말들이 여전한 가운데, 유 센터장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건물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고 나서 부실 건축물을 지을 수 없도록 법과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대중교통을 타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건 대구지하철 참사가 있고 나서 지하철 객실 의자가 불연재로 바뀌고 탈출용 망치 같은 비상 도구가 설치됐기 때문이에요. 이 모든 건 재난 피해자와 가족의 끊임없는 눈물과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센터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도 그런 변화를 만드는 거예요. 재난 피해자들을 '시체 장사하는 사람들', '자식의 죽음을 팔아 한몫 챙기는 사람들'로 손가락질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분들은 우리 사회에 도움을 줬던 사람들, 슬픔을 갖고 있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재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특별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전해지기 위한 비용을 미리 지출하는 일이라는 걸 꼭 말하고 싶어요."

 
a

지난 2일 서울 중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유해정 센터장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복건우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 #인터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꼼꼼하게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복건우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