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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작은 편의점이 사라졌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라지게 할 때

등록 2024.02.14 17:11수정 2024.02.1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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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후문을 지키던 편의점이 사라졌다. 이사를 나간 공허한 상가 간판 자리에 A4 용지 종이 한 장이 겨우 매달려 있었다. 간판은 진작에 떨어졌다. 나머지는 바람에 날아간 건지, 사장님이 뒷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실수로 한 글자만 남기고 간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제 딱 하나 남은 종이 한 장이 멸망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같았다.


'마'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원래 '마지막 할인'이었나, '장사 마지막 날'이었나, 하는 글자였다가 모두 떨어지고 하나만 남았다. 매일 드나들던 편의점이 정말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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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마' 한 장. 모두 떨어지고 이것만 남았다. ⓒ 서나연

 
사장님은 장사를 접기 일주일쯤 전부터 디데이 표시를 붙여 놓았다. D-7이었다가 다음 날이 되면 6으로 숫자가 바뀌는 식이었다. 사장님은 매일 아침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숫자를 프린트해서 붙였을까? 아니면 7,6,5,4,3,2,1,0을 한번에 인쇄해 놓고 하나씩 차례대로 붙였을까? 

나는 장사 마지막 날에 편의점에 인사를 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 물건을 살건 아닌데.. 그냥 인사하러 왔어요. 더 좋은 곳으로 가세요. 돈 많이 버시고 건강하세요." 나는 그냥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눌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사장님은 갸우뚱 하시는 거였다. '좋은 곳', '돈 많이 버시고' 라는 정도의 표현이 마음에 걸리셨던 걸까. 입은 살짝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설렘이 아니라 걱정이 가득했다.

"더 좋은 곳이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편의점 사장님은 아직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 더 붙임성이 좋았다면, 아니 조금 더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했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죠! 무조건 잘 되실 겁니다!"라며 하이파이브라도 짝 쳤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경직된 목소리로 "잘 되실 거예요" 정도로 말했다.

정말 그러길 바랐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를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말하면서도 아쉽고 마음이 찐득거렸다. 힘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운 것 같았다. 


아파트 후문 앞 이 편의점은, 아이의 어린이집 버스가 내리던 곳이라 우리가 루틴처럼 가던 곳이었다. 어떤 날에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마보다 편의점을 먼저 찾았다. 90센티의 작은 몸으로 무거운 유리문을 열려고 낑낑대면 "해월아, 같이 가야지." 하면서 내가 뒤따르곤 했다.

편의점은 작았다. 과자칸에 서 있으면 카운터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소리는 들렸다. 만약에 내가 편의점 계산원이었다면 분명히 손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을 것 같다. 특히 어린 아이 손님은 귀여워서 눈길이 간다. 

아이는 과자를 사 달라고 떼를 쓰는 편이었다. 달콤한 맛을 알아 버린 아이는 뽀로로 음료수나 초콜릿, 솜사탕 같은 것도 좋아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아이를 울릴까 봐 난감해하곤 했다.

우리는 좁은 공간에서 꽤 다양한 표현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이 과자 칼로리 한번 보자." "아니, 이건 매운 거야. 언니 오빠들 먹는 거." "둘중에 뭐가 갖고 싶어?" 같은 말을 했다. 아이는 "엄마 이거 무슨 맛이야?"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 "이거 저번에 내가 먹었던 거다." 같은 말을 했다. 

간혹 아이가 울 때면 단호하게 제지하거나 끌고 편의점 밖으로 나가는 게 내 몫이기도 했다. 어쨌든 카운터에 있는 계산원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거나 친구랑 카톡을 하거나 아니면 멍을 때렸을 수도 있다. 소리 따위야 귀로 듣더라도 뇌로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카운터에 서 있을 사람 한 명을 많이 의식했다. 

카운터에 갈 때마다 아이에게 인사를 시켰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해월아. 언니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라고 해봐." "안녕히 계세요, 따라해봐." "해월아, 감사합니다 해야지."

종종 바뀌던 계산원들은 모두 온도가 달랐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은 보이지 않은 채로 손만 흔들어 주시는 분이 있었고, 아이를 보고 활짝 웃는 분도 있었다. 아이보다는 나를 더 신경쓰며 쑥스럽게 "안녕히 가세요" 하는 분도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도심 한가운데가 아니라 광역시의 외곽이었다. 지하철역까지 2킬로가 넘게 걸리고 시내까지는 차로 40분이 걸리는 곳. 새로 생긴 도시라 맛집도, 카페도, 독서실도 5년 사이에 지어졌다. 이 편의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라는 사람이 이 동네의 이미지를 만들어간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편의점은 나와 아이에게 우리 동네의 중심이었다. 매일 드나드는 곳이었고, 계산원이라는 동네 사람을 만나고 인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와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손님이었지만, 가끔은 계산원이 우리의 손님 같기도 했다. 그런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정문의 편의점이 결국 문을 닫고 간 후문 앞 편의점은 훨씬 커다란 공간이었다. 건너편 아파트 정문과도 마주보고 있어서 두 아파트 주민을 전부 끌어당길 수 있는 위치였다. 사장님은 후문 편의점이 생기고 나서는 매출이 1/3로 줄었다고 했다. 달에 백만 원 내외로 남았는데,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했다고. 어쩐지 그 즈음에는 야간에 사장님이 직접 계산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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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 새로 생긴 편의점. 정문에 있던 편의점보다 다섯 배는 크다. ⓒ 서나연

 
새로운 편의점은 넓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가 카운터까지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인사는 꼬박꼬박 했지만, 이상하게 작은 편의점에서의 따뜻한 느낌은 없었다. 넓게 벌려진 매대 사이의 간격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얼마간 멀어지는 것 같았다. 서로의 목소리 크기를 신경써야 하거나,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몸을 비스듬히 기대야 했던 적도, 벽에 딱 붙여야 하는 상황도 없었다.

우리의 세상에는 편의점만 있지 않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날 때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얼굴을 가깝게 마주쳐야 할 때가 있다. 물론 나도 셀프주유소를 찾고, 요즘 마트에는 무인정산기가 많이 보급되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마주쳐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약간 딱딱하고 특별한 감흥은 없기도 하다. 

넓은 집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지하철의 북적임보다 자가용의 쾌적함을 부러워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작은 것이 주는 의미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까움, 피부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체온, 마주할 수밖에 없는 눈빛이 있다. 지나고 보면 그런 것이 남는다. 작은 편의점이 아니었더라면 아이와의 대화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은 흩어졌을 것 같다.

사진을 찍으며 차가운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공간의 따스함이 더 느껴졌다. 이제는 임대 표시가 붙어 있어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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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 표시가 붙은 예전 편의점 공간. 아파트 정문에 있다가 사라져 버렸다. ⓒ 서나연

 
오후 네 시, 해는 아직 있고, 저녁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 방금 버스에서 내린 활짝 웃는 아이와 아이만을 기다리던 나. 우리를 담아 주었던 공간이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여기 있던 편의점이 없어졌어." "응, 맞아." "편의점이 왜 없어진 거야?" "다른 곳으로 이사간 거야." "왜 이사를 가?" "우리도 곧 이사를 가지? 원래 사람은 종종 이사를 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우리 가족도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대출을 끼고 무리를 해서 넓은 집을 얻었다. 남편은 그저 신이 났지만, 내가 지켜야 할 마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넓은 것, 편한 것, 쾌적한 것 이면의 무언가를 보고 싶다. 좁은 것, 불편한 것, 답답한 것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싶다.

나는 작고 연약한 것들이 더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야 어떤 소중함들이 지켜질 것 같기 때문이다.
#편의점 #자영업자 #임대 #소상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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