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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 대명사, 조병갑의 죄상을 들춰 보니

땅 없다고 세금, 불화했다고 세금... 고부군의 중심 읍내를 찾아

등록 2024.02.23 16:29수정 2024.02.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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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이제 고부로 걸음을 옮긴다. 조선 8도 행정단위를 부목군현(府牧郡縣)으로 나눌 때 고부(古阜)는 18개 면을 거느린 어엿한 군(郡)이다. 서해안에 잇닿은 비옥한 땅에서 산출되는 풍부한 물산으로 전라도 경제 중심지라 할 만큼 번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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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읍내 고부면 고부리의 전경. 우측 두승산 자락과 좌측 성황산과 남산이 이룬 분지에 읍내가 앉았다. 앞에 보이는 정자가 군자정. ⓒ 이영천

 
이는 거꾸로 그만큼 빼앗아 갈 게 많아, 고부 군수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고부 읍내 풍경


곰소만 따라 들어 온 해안선 맨 안쪽에 줄포(茁浦)가 앉았다. 거기서 동쪽으로 삼십 리, 닭 볏 모양의 두승산이 영험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다. 이 산 서북쪽에 성황산과 남산이 분지를 이룬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 고부 읍내다. 읍내는 1890년대와 비슷한 규모지만, 당시엔 대단히 넓은 행정권역을 갖던 고부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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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산 줄포에서 고부로 가는 길에서 본 두승산. 닭볏 모양의 영산이다. ⓒ 이영천

 
고부를 통솔하던 관아는 성황산 남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조선 관아가 그렇듯 이곳도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그나마 옛 흔적은 관아 터 옆에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향교뿐이다.

고창 방장산에서 발원한 고부천이 드넓은 고부 평야를 거느린다. 내장산에서 발원한 정읍천이 김개남의 고향 상두산에서 발원한 동진강과 말목장터 부근에서 합수, 품을 넓혀 망망한 배들(梨平)을 펼쳐 놓는다. 풍성한 쌀을 쏟아 내는 배들은 김제, 태인, 정읍, 흥덕, 부안과 맞닿아 가 없는 지평선을 그려낸다. 배들을 적시며 몸집을 불린 강줄기가 양양하게 서해로 빠져나간다.

강이 몸집을 부풀리는 하류에, 엎어 놓은 밥사발 모양의 낮은 산 하나가 있다. 해발 47m의 백산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수십 리가 한눈에 잡히는 요술을 부린다. 한때 채석장으로 산 전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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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관아 터 고부 관아 터에 초등학교가 앉았고, 사진 좌측으로 향교가 보인다. ⓒ 이영천

 
지금의 고부는 면(面)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안과 고창, 김제에 일부 떼어주고 남은 땅은 정읍에 편입되어 면으로 전락하고 만다.

고부는 조병갑이라는 인물을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하는 고장이다. 그가 기생 끼고 여흥을 즐겼다는 '군자정'이 목 잘린 송덕비와 함께 고부 행정복지센터 앞에 앉아 있다. 군자정 좁은 돌다리를 건넜을 조병갑의 취기에, 배곯은 고을 백성의 원성이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허가받은 도둑'


교조신원운동이 잦아들 즈음 전라도 모든 고을에 수탈이 자행된다. 삼정 문란은 이제 고전으로 불릴 지경이다. 여기에 균전사 김창석과 전운사 조필영까지 가세해 전라도 전체에 원성이 자자하다. 가히 관리는 허가받은 도둑이었고, 나라는 이들 무뢰배를 용인하는 저잣거리 좌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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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평야 고부천 좌우로 넓게 펼쳐진 고부평야의 모습. ⓒ 이영천

 
특히 고부가 극심하다. 군수 조병갑은 가히 수탈의 달인이었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이름도 희한한 각종 세금이 난무한다. 수확 철이 되자 제각각 명분으로 곧장 징수하겠다는 방문(方文)이 고을 곳곳에 나붙는다. 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에서 수령질 하는 조병갑 입장에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기회기에 그 폭압은 불문가지다.
 
때는 계사년(1893년) 시월 즈음이다. 전라도 고부, 전주, 익산 등 삼군에서 한꺼번에 모두 민란이 일어났다. 각 고을에서 관리의 횡포와 탐학에 견디다 못해 일어난 난리다.

민란의 실마리는 가결전(加結錢=토지세)이니 가호전(加戶錢=건물세)이니 하는 등의 각양각색의 무명 잡세에 국결환롱(國結幻弄=세금을 더 걷으려 군수 맘대로 토지 단위를 늘이는 행위)과 백지징세(白地徵稅=황무지를 개간한 세)며 유망(流亡=도망간 집 이웃에 부과하는 세), 진결(陳結=오래 묵은 전답 세), 은결(隱結=탈세 목적으로 누락시킨 토지), 허복(虛卜=땅 없는 사람이 무는 세금) 등이며 불효, 불목(不睦=화목하지 못한 죄), 불경, 독신(瀆神=신을 모독), 상피(相避=근친상간) 등 죄목으로 백성을 잡아들여 돈을 받고 풀어 주는 행위 등이다.

민란의 동기는 고을마다 조금씩 달랐다. 고부의 경우 수세미람봉(水稅米濫捧)과 양여부족미(量餘不足米)를 재차 징수한 일과 기간진답도조람봉(己墾陳畓睹祖濫捧=개간한 땅과 오래 묵은 황무지에 농사지었다고 걷는 세), 미간진답시초세(未墾陳畓柴草稅=미개간지나 묵은 땅에서 땔감을 징발), 결복환롱(結卜幻弄=토지에 붙는 세금을 꾀를 부려 농락) 등 여러 가지 일로 일어난 것이며 …(중략)…
 
가혹하더라도 여기까지는 전라도 각지 통상의 수탈로 읽힌다. 조병갑은 이에 더하여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니 바로 만석보(萬石洑) 쌓는 일이다. 이는 다음 편에서 살핀다.
 
양여부족미(量餘不足米)는 호남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이 전라 각지에서 쌀로 거둔 세금을 한양으로 실어 보내, 경창(京倉)에서 다시 계량해보니 부족하다면서 고부 백성들에게도 다시 걷어간 세미였다. 그 쌀이 한양 창고까지 가 부족해진 것을, 백성 잘못이라고 하여 그 부족분을 강제로 다시 걷는 행위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여론이다.

애당초 그 쌀을 받을 때 각 해당 조창(漕倉) 관리가 몸소 거두면서 좌우로 관졸(官卒)이 늘어서서 서축(鼠縮=쥐가 먹음)이니 건축(乾縮=쌀이 마름)이니 하며 쌀 한 섬에 삼사오두(三四五斗, 1두=1말)씩 쌀을 더 거둬 입고한 것인데, 그것이 도리어 부족이 났다고 하여 민간에 다시 걷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이다.

그 쌀이 부족해진 원인이 백성에게 있는 게 아니고 탐관오리들 무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쌀을 처음 창고에 입고할 때 창고 관리가 죽침(竹針) 질로 빼내고, 그다음 배에 실을 때 뱃놈 패거리와 그 일을 맡은 아전 패거리가 잔꾀를 부려 빼낸 쌀도 있고, 경창(京倉)에서 세수(稅收)로 잡을 때 창고 패거리가 잔꾀를 부리는 일도 허다하고, 또는 전운사 자신의 범포(犯逋=국고에 바칠 전곡을 끌어다 써 버림)도 있는 것으로써 민간에 다시 징수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는 말이다.

이러한 부족을 민간에 다시 징수하라는 영(令)이 있어 고부 군수 조병갑이 이일을 기화(奇貨=뜻밖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나 그런 기회)로 여겨 민간에 늑봉(勒捧=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바치게 함)하게 되는 것이며 기타의 것도 모두 임의로 람봉(濫捧=수량을 규정에서 벗어나 함부로 더 받음) 하므로 고부 백성들이 극도의 분노를 느껴 고부 18개 면 수백 동리에 있는 수만 명의 백성이 일시에 들고 일어났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91∼193 의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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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순 공덕비 태인 피향정에 남아 있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의 공덕비. 맨 오른쪽 검은 비석이다. ⓒ 이영천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심지어 이웃 고을인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조규순) 공덕비를 세운다며, 고부 백성들로부터 돈을 뜯어 갈 정도다. 태인 현감을 기리는 비석이 고부 백성 피땀으로 세워진 셈이다. 공덕비는 태인 피향정 마당 한쪽에 아직도 세워져 있다.

조병갑을 위한 변명? 조병갑은 전국에 산재했었다

농업은 당시 조선의 주된 산업이다. 따라서 농민에 대한 수탈은 모든 백성을 궁핍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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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 조병갑이 여흥을 즐겼다는 군자정. 수탈이 심했던 고장답게, 군수를 역임한 관리들 공덕비 목이 죄 잘려 있다. 사진 오른쪽 산이 관아가 있던 성황산. ⓒ 이영천

 
소극적으로 대응한 농민은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된다. 적극적인 대응은 고을 수령에게 소(訴)를 제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소요사태나 민란을 일으켜 수탈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근본에서 나라의 기반이 뿌리째 썩어, 백성을 수탈하는 탐학은 더욱 강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수탈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얼굴 다른 조병갑이 전국에 산재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가 청렴한 관리도 아니었고, 다른 고을에 비해 수탈의 강도가 결코 약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방방곡곡에서 모두 일어난 일반화된 수탈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분명 억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고부라는 지역에 전봉준이나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의 인물과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측면에서 그는 지독하게 운이 없는 인물일 수도 있다. 곪을 만큼 곪은 상처, 노란 고름으로 가득한 부위가 바로 조병갑일 뿐이었다. 이게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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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지도 고부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부 옛 지도. 읍을 둘러싼 산과 주요 전각을 표시했다. ⓒ 이영천

 
당시 농민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다.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빼앗기고, 남은 절반의 반 이상이 세금이다. 여기에 저런 이름도 모르는 무명 잡세의 수탈이 얹힌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 입에 풀칠하기에도 턱없는 실정에 갖은 명목으로 잡아들여 매질로 닦달하면, 살기 위해 없는 돈이라도 구해다 바쳐야 할 판이다.

궁핍으로 쫄쫄 배곯는 세상, 얼굴에 온통 버짐이 피어날 지경이다. 하지만 흡혈귀 같은 관리와 여흥민씨들이 나라 주인행세를 하는 한, 이를 바로 잡을 길은 너무도 요원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암울한 시대다.
#동학농민혁명 #고부 #조병갑 #수탈 #탐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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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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