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불멍' 할 때에 나는 '건조기 멍'을 때렸다

집에서 주부 역할 하는 남편, 여전히 건조기를 사랑합니다

등록 2024.02.29 15:51수정 2024.02.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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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주부의 위치를 맡고 있기 때문에 집안일의 능률을 올려주는 가전제품에 관심이 늘 많다. 수많은 가전제품들을 겪어봤지만, 내 삶의 질을 한 5단계 정도 업그레이드시켜 준 제품은 바로 건조기다. 


아직도 건조기를 처음 접했던 어느 겨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우리 집 세탁기는 고장 나버린 상태였다. 고치기도 모호하고, 사기는 어려웠던 시기라 가까운 빨래방을 찾았다. 거기서 만났던 거대한 드럼 세탁기의 충격은 건조기의 위엄을 보고 망각 한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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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건조기 ⓒ pixabay

 
집에서 빨래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빨래를 개는 것도 일이지만, 그전에 빨래를 너는 것이 진정한 일 중의 일인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통돌이 세탁기에서 빨래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무슨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끝에 있는 것을 꺼내려면 몸을 반쯤 집어넣어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구겨지고 엉킨 인생 같은 빨래를 하나하나 해체해서 두 손으로 잡고 팡팡 쳐서 건조대에 여백을 생각하면서 너는 건 정말 일이다 일. 

빨래를 논다고 자동으로 마르나? 미세먼지 측정하고 적절한 곳에 배치해서 말리지 않으면 여름날은 빨래에서 걸레 냄새가 나고, 겨울에는 마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입을 옷이 없는 날을 마침내 맞이하기도 한다. 

건조기는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가졌다. 몇 벌인 지 셀 수도 없는 빨래들은 한 움큼 입에 물고 가글이라도 하듯 까르르 돌리기 시작하는데 그 위엄이란 땅을 진동케 하는 것과 흡사했다. 이 광경이 너무 놀라워서 나는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가며 윙윙 소리를 내는 건조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마나 바라봤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흐르고 건조가 완료되었을 때의 그 불타는 뽀송뽀송함이란 이제까지 빨래에서 느껴보지 못한 촉감이었다. 

그 겨울에 나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빨래방에 가서 건조기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30~40분 정도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빨래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어쩐지 텅 빈   내 마음 같기도 하고, 너는 빨래라도 채우고 돌리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겨울이 끝날 무렵 내 꿈은 건조기 너야,라는 목소리가 생겼고, 실제로 그 당시 이사를 하자마자 건조기를 샀다. 

맙소사, 빨래방에서만 보던 건조기가 우리 집에 있다니. 이사 와서 가장 빨리하고 싶은 일이 빨래를 한 후 건조기 돌리는 일이었다. 빨래방에서 본 것처럼 무지막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우리 집 빨래들을 삼키는 데는 충분한 용량이었다. 빨래를 머금고 자신 있게 돌아가는 모습이 웅장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신기해서 건조기 내부조명 기능을 켜고 또 한참을 앉아서 그것만 쳐다봤다. 남들은 '불멍'한다고 할 때에 나는 틈날 때마다 '건조기 멍'을 때렸다. 마음이 너무 텅 빈 것 같을 때,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생각이 정리 안 될 때, 걱정 근심이 많을 때, 이상하게 그 앞에 앉아서 돌아가는 모습과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 

빨래방을 왔다 갔다 하며 거의 짐보따리를 수준으로 빨래를 싸서 다녔던 시절이 생각났다. 이제 그 짓을 안 하고 이걸 집 안에서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첫 건조기 시연을 마치고 빨래를 꺼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빨래에 이렇게 먼지가 많다는 충격적인 깨달음 또한. 

여전히 나는 건조기를 사랑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런 백색 소음에 가까운 소리와 반짝이는 빛들을 보는 걸 늘 좋아했다는 기억도 든다. 20대 시절에는 그렇게 가로등을 좋아했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집 앞에 앉아서 그걸 바라보며 한없이 '가로등 멍'을 때렸다.

한강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달려서 아무도 없는 고요한 나만의 장소에 앉아서 가로등을 바라보며, 강물 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멍을 때렸다. 너는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그렇게 빛을 비추고 있구나. 난 누구지, 여긴 어디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그렇게 말이다. 

지금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건조기와 세탁기가 포개어진 상태로 화장실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예전만큼 자주 건조기 멍을 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좀 슬프다. 모두가 잠을 잘 때 미리 빨래해 놓은 다음에, 건조기를 돌리고, 내부조명을 켜고 그렇게 그 앞에 한없이 앉아서 멍을 때리며, 함께 떠날 미래도, 지금의 불안한 모습도 안은 채로 밤새 함께 두런두런 얘길 나누고 싶다. 
#건조기 #세탁기 #불멍 #사랑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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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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