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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요!"... 대전 명당에 부는 '역사적 묫바람'

일제청산과 대전현충원의 '파묘사'...여전히 잠들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

등록 2024.03.17 11:49수정 2024.03.1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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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대전현충원 측이 서춘의 묘비를 제거했다.애국지사 서훈이 박탈된 1996년이후 8년만의 일이다. ⓒ 심규상

    
"'파~묘'요!"

영화 <파묘>를 보면 유가족과 일꾼들이 파묘 전 "파묘요!'를 크게 외친다. 오컬트는 아니지만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도 파묘의 서사가 있다. 

독립운동 행적이 가짜로 밝혀지거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되면 현충원을 나가야 한다. 파묘다.

대전현충원에서 서훈 취소로 파묘된 인물 중에는 우선 서춘(1894~1944)이 있다.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서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1963년 서훈을 받아 1989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2.8 독립선언 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이후 변절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알려진 매일신보사의 주필을 지낼 때,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일할 때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박탈(1996년)됐다. 

하지만 서훈이 박탈된 후에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서 8년을 더 머물렀다. 이장을 요구했지만 유족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전현충원 측이 묘비를 뽑자 그제서야 유족들이 파묘(이장)했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그의 묘비가 뽑힌 일과 파묘 사실을 각각 처음 보도했다(관련 기사: 서훈 박탈 8년 만에 '서춘' 묘비 뽑히다 http://bit.ly/2kWA5D).

또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던 인물 중 박성행(1892∼1950), 김응순(1891~1958), 박영회, 유재기(1905∼1949), 이동락(1890∼1969)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박탈(2010년 또는 2011년)됐다. 이후 파묘를 하기까지는 또 수년이 걸렸다. 박성행의 경우 2015년 말에야 파묘했다. 대전현충원이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이라 유족에게는 묫바람(묏자리에 탈이 나서 누워 있던 영혼들이 편안하지 않아 후손들에게 해를 미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인지 대부분이 이장을 미뤘다.

강영석(1906~1991)은 서훈이 취소됐지만 묘비만 뽑히고 파묘는 면했다. 그의 부인 신경애(1907~1964)는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 등으로 건국포장(2008년)을 받았다.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취소됐지만, 부인의 안장 자격을 빌려 여전히 안장돼 있다.


대전현충원 첫 파묘 시위 대상은 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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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사회단체의 대전국립묘지 앞 파묘 촉구 시위 ⓒ 심규상

    
파묘를 하기 전 '파묘요!'를 크게 외치는 이유는 묻힌 사람에게 묘를 파더라도 놀라지 마시라는 사전 안내의 의미다. 대전현충원 묘지 앞에서도 매년 '파묘'를 외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들이 '파묘'를 소리치는 이유는 친일반민족 행적이 분명한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서훈이 취소되지 않아 파묘를 할 수 없어서다.

기록으로 본 대전현충원의 첫 파묘 시위는 1998년에 있었다. 첫 안장을 시작한 1982년(준공 1985년)을 기준으로 16년 만이다. 파묘 촉구 첫 대상은 김창룡(1920~1956)이다. 당시 지역 사회단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 회원들이 첫 시위를 벌였는데 그의 묘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이장(1997년)되자마자 용케 그 사실을 알고 파묘 시위를 벌였다.

김창룡은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헌병부대에 군속돼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관동군 헌병보조원을 거쳐 헌병이 됐다. 이후 대공 사찰을 담당하며 2년 동안 50여 건의 항일조직을 적발, 독립군 체포와 고문에 앞장섰다. 이 일로 공을 인정받아 헌병대 오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직후 친일 행적으로 소련군에 체포됐으나 탈출했고 월남해 군부에 투신했다. 조선경비대 3기생 출신으로 육군 특무대장이 됐다. 

이후에도 김구 암살 등 수많은 정치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한국전쟁 때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가 죽자, 이승만 대통령은 애도와 함께 육군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대한민국 최초로 국군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파묘 요구 대상자, 75명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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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있는 김창룡의 묘(2021년) ⓒ 심규상

 
<월간 말> 편집위원을 역임한 정지환 독립기자가 지난 2003년 발품을 들여 충남 금산군 추부에서 김창룡의 묘비를 찾아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불행히도 순직하였다'로 시작되는 그의 비문에는 '… 군경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열)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 전시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하였다'고 쓰여있다.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음을 역설로 확인해 준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에서 근무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2000년 재미교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은) 전부 김창룡이 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묘비 글을 좀 더 옮겨보자.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셔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중략) 아-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 묘비를 쓴 인물이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역사학자이자 문학박사인 이병도다. 그러나 그는 실증사학의 대부이기 이전에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했다. 이승만에게 부역했다. 또 영화 <파묘>에서 '나라를 팔아먹어 관직을 크게 받은 친일 매국노'로 언급해 연상되는 '이완용'의 조카 손자이기도 하다.

이병도는 원광대 박물관에 있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고 새겨 있는 이완용의 관뚜껑을 가져가 태웠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자신의 가문이 손가락질받는 것을 우려해 역사 유물을 없앴다는 의혹이다.   

지역 시민사회가 지목한 파묘 대상자는 김창룡을 포함 대전현충원 안장자만 75명에 이른다. 친일반민족행위자 37명, 5·16과 12·12군사반란 가담자 21명, 반헌법행위자 7명, 제주 4.3 등 민간인학살 관련자 10명 등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이 중 여야가 합의한 일부에 대해서라도 파묘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했지만 22대 총선을 앞둔 지금까지 요지부동이다.

대전현충원 속 현실의 '파묘' 외침은 1998년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후손을 괴롭히는 '역사적 묫바람'으로 불고 있다. 겁나게 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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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사회단체는 매년 대전국립묘지를 찾아 반민족행위자 파묘를 요구하고 있다. ⓒ 심규상

#대전국립묘지 #대전현충원 #파묘 #이병도 #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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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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