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도전

등록 2024.03.13 16:16수정 2024.03.1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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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인 3월 첫날,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밤새 동물 울음소리를 연상할 만큼 강한 바람이 불더니 아침이 되자 잦아든다. 그동안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 탓에 잠깐의 추위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지만 자연의 이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겨우내 빈 가지와 바싹 마른 풀만이 가득했던 삭막한 들판에 서서히 봄기운이 돈다. 땅바닥에 이파리를 붙이고 추위를 견디던 민들레가 기운을 차리고, 말라비틀어진 누런 잎 사이사이에서 풀과 쑥도 힘을 받아 연한 새잎을 내민다. 천변에 축 늘어진 갈색 수양버들 가지도 어느새 노란색으로 물이 올라 새잎 틔울 준비를 마쳤다.

2024년 2월 29일, 42년 몸담았던 교직 생활을 끝내고 6년 동안 정보를 주고받았던 교사 단체 카톡 방에서 나왔다. 방학하고 한 달을 쉬다 새 학년 준비 기간(2. 19.~2. 21.) 첫날인 2월 19일 새로 온 후배 수석교사에게 인수인계도 하고 몇 개 남겨놓은 짐도 챙길 겸 출근 준비를 하는데 가슴이 설렌다. 이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돼서 홀가분하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어이없고 당혹스러웠다.

2월은 퇴임 축하한다며 여기저기서 불러 쫓아다니느라 바빴지만 많은 사람의 격려에 가슴 벅차고 뿌듯했다. 도 교육청에서 퇴직 교원에게 주는 훈‧포상식에 참석해 황조근조훈장도 목에 걸어봤고, 지역 교육청에서는 교육장님이 점심을 사 준다고 해 다녀왔다. 전남수석교사회에서도 거창하게 식을 치러줬고, 친한 선 후배가 건네준 꽃다발 덕에 한 달 내내 꽃향기에 취해 지냈다.

3월 7일, 오늘로 직장을 떠나 집에서 쉰 지 사흘이 지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섯 시 40분, 서두를 필요가 없어 다시 잠을 청한다. 일곱 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한다. 남편은 삶은 달걀, 고구마와 사과 한 개, 나는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고 방으로 들어가 그동안 사서 쟁여 두었던 책을 읽는다.

요즘은 넉넉한 시간 덕분에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도 챙겨 본다. 점심 먹고 만 보 걷다 오면 세 시가 넘는다. 겨울 방학이 되자 시작한 걷기는 웬만하면 거르지 않고 지금껏 계속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하루가 소리 없이 후딱 간다. 이런 여유가 아직은 낯설다. 하기야 그 긴 세월을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게 몸에 배었는데 생활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바쁜 생활에도 손에 잡히는 성과가 있었는데 의미 없이 보내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겨울 방학 두 달 동안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고 동화 창작도 마찬가지로 미루다 손도 대지 못한 채 수업 날이 돼 버렸다.

자책하고 있는데 때맞춰 친한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복지 시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인천에서 사업을 총괄하는 선생님이 내려온단다. 먼저 지인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하기로 약속한 함평 복지원에 들러 일을 마치고 오후에 순천으로 넘어온다고 했다. '순천 에스오에스(SOS) 어린이 마을'에서 교육지원 담당자와 같이 만나기로 했다.

'순천 에스오에스(SOS) 어린이 마을'은 친부모 양육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에스오에스(SOS)가정이라는 독립적인 대안 가정을 제공하고, 연령대가 다른 다섯 명 안팎의 아이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아동 복지 시설이다.

자동차 앞 유리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멈추고를 반복한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자주 수영하러 다녔던 곳이라 익숙하다. 아담한 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천(川)을 끼고 산으로 둘러싸여 자연환경이 좋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원장님과 에스오에스 어머니,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 정보를 공유했다. 수업할 날과 시간만 정했다. 3월 14일부터 월, 목요일 세 시간씩 아이들과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복지사 선생님이 아이들 특성을 정리해 보내왔다. 

날마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작게나마 하루하루 마주치는 일이 다르다. 움직임이 없던 식물도 달라진 게 눈에 띈다. 아파트 옆 천에서 겨울을 나던 청둥오리 떼도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어제부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퇴직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내게도 또 다른 도전이자 변화가 생겼다. 다음 주부터 시설에 사는 아이들을 만난다. 앞으로의 생활이 어떻게 펼쳐질지 걱정도 되지만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다.
첨부파일 변화.hwpx
#도전 #변화 #시설아이들 #한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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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수석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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