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9 16:16최종 업데이트 20.12.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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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에 '여성 롤모델'이라고 검색해 본다. CEO, 과학자, 총리, 경찰청 수사국장, 기업 임원, 교수 등 으리으리한 분들이 뜬다. 멋진 분들이지만, 롤모델로 삼기엔 어쩐지 멀다. 이번 생엔 저분들처럼 멋진 사람이 되긴 어려울 것 같다. 나 또한 더 많은 여성 리더십을 보고 싶지만, 거기에 내 자린 없는 것 같다. 

사실은 거기에 내 자리가 있기를 소망하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계급과 빈부의 차를 내 힘으로 무력화할 수 있었다면 그 높은 자리엔 언제나 가난한 여성이 있었을 것이다. 또 사실은 내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게 슬프거나 아쉽지 않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만 바꿔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고 뉴스에도 잘 실리지 않는 사람들, 골목의 새벽을 열고 밤을 닫는 사람들, 가난하고 가진 거 없어도 쫓겨나선 안 되고 차별당해선 안 된다고 싸우는 사람들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이고 지고 버텨 왔다. 

가난한 여성들이 나를 살게 했다
  

궁중족발 윤경자 사장이 새 가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서촌에 있던 궁중족발은 올해 10월에 홍은동에서 재개업했다. ⓒ 박김형준

  

아현포차 작은거인이모가 아현시장에 둥지를 튼 가게에서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다. ⓒ 박김형준

 
2020년, 옥바라지선교센터가 연대한 현장에서 빈곤 차별에 저항하는 가난한 여성의 모습이 나를 살게 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을 바꿔낸 궁중족발 윤경자 사장님, 아현포차 거인이모와 강타이모는 건물주와 구청이 무너뜨린 가게를 다시 세웠다. 요리사복을 갖춰 입고 다시 주방에 섰다. 한 자리에서 수십 년간 같은 요리를 했으면 으레 원조라 불린다. 따라 하려야 따라 할 수도 없는 세월의 요리가 다시 만들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지키는 수십 명의 여성 상인은 수차례의 강제집행과 물대포 직사살수까지 견뎠다. 코로나인데 강제집행은 되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회는 할 수가 없다. 게다가 5인 이상 집합금지다. 모든 게 힘겹다. 그래도 조를 나눠 교대로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순번이 돌아온 상인은 농성장의 난로 하나에 모여 코로나만큼 힘든 한파를 견딘다. 농성장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이다.

빈곤차별을 철폐하라고 외치는 가난한 여성의 힘을 볼 때 나는 온몸에 피가 돌고 살맛이 난다. 그 힘은 집과 가게를 부수는 포클레인에 맞서는 힘이다. 포클레인이 휩쓸고 간 자리에 다시 농성장을 세우는 힘이다. 30년 된 단골손님의 자식까지 기억하며 식탁을 차려온 장인의 힘이다. 건물주에게만 유리하게 된 법을 바꾸는 힘이다. 하루종일 생선을 잡다가도 철거용역이 들어오는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스크럼을 짜는 힘이다.
 

아현포차 강타이모가 대흥동에 마련한 새 가게 '태영식당'에서 웃으며 요리하고 있다. ⓒ 박김형준

  

노량진수산시장 상인이 농성장에서 키우는 고양이 '역전이'를 돌보고 있다. 역전이는 구시장에 있을 때부터 시장 상인과 함께한 고양이다. 상인들은 구시장이 철거될 때 고양이를 구출해 농성장으로 데리고 왔다. ⓒ 은석

 
가게와 시장과 집을 지켜온 가난한 언니들은 올 한 해, 자주 울고 웃었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을 때도 있었고 강제철거의 장면은 생각도 하기 싫다며 몸서리칠 때도 있었다. 농성장을 지키면서 드라마를 보기도 했고 가을이면 은행을 까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걸려오는 자식과 손주의 전화를 다정하게 받다가도 전화를 끊고 나선 자식에게 미안해 하기도 했다. 

인생의 수많은 갖가지 곡선에 이리 구르다, 저리 구르다 했지만 단 하나, 가게와 시장과 집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연세 되셨으면 쉬셔라, 다른 일을 알아보시라, 꼭 거기서 장사해야 하냐고 했다. 가난한 여성은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50년간 일하고 가꿔온 그곳이 나와 이웃들의 공간이라고, 이게 내 천직이라고 맞서 이야기했다.

이들이 내 인생의 여성 롤모델이다. 자식이 장성하고 손주까지 본 나이가 돼도 저들처럼 차별에 저항하며 살고 싶다. 가난한 언니들은 가난한 내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다.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가난한 사람이 언제든 쫓겨나도 되는 세상이어선 안 된다는 것, 차별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먹고사는 일은 귀한 일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같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언니들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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