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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종료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세계주요 언론들이 한국군의 월남전 개입과정에서의 베트남 양민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나서고 있어 이 문제는 더 이상 덮어두고 쉬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게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들이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을 보도하는 의도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도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한국의 도덕적 위상에 일정한 타격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다.

또한 베트남 전쟁 종료 25 주년을 맞이하면서 미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학살 사건은 크게 부각되지 않도록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 또한 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한 보상이 기준이 되면, 베트남이 이를 근거로 우리에게 마찬가지의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니 이해득실을 계산하라는 메세지를 주지시키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선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미군에 의한 초토화작전에 따른 양민들의 희생, 그리고 한국군의 파병과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애초부터 일어날 이유가 없었던 전쟁이었다. 그것은 평화적 선거를 통해서 베트남의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던 과정을 저지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혼란에 빠뜨린 미국의 개입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에 대하여 오랜 항불독립투쟁을 벌여왔고, 2차 대전 이후 독립국가의 열망에 불타올랐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2차대전 이후 일본에 의해 잠시 장악되었던 베트남에 재진격하여 베트남을 재식민지화하려고 했다.

그러자 호지명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독립운동세력들은 다시 이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프랑스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면서 <1953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일체의 외국군대가 철수하고 남북 베트남의 총선을 통해 새로운 베트남 건설을 보장하는 상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전개에 대하여 미국은 베트남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던 호지명이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제네바 협정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로써 미국은 남베트남 지역에 자신이 지원하는 친미분단정권을 수립하여 총선절차를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서 남베트남 내부에서는 미국의 정책과 미국이 세운 친미분단정권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남베트남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즉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나 통일된 베트남을 세울 수 있었던 상황을 미국이 개입해 들어가 좌절시켰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이들 저항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은 이후 군사적으로 대대적인 개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는 식민통치지배세력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베트남의 산하를 파괴했고 베트남인들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정통성이 없고 부정부패로 치달은 남베트남 정권은 미국의 의사대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으며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마치 수렁에 빠지는 듯한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미군에 의한 베트남인들에 대한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베트남 산하의 파괴가 매체를 통해 보도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다. 의회의 문제제기가 있게 되었고, 미국은 이제 베트남에서 빠져 나올 차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만 국제여론의 공격 목표가 되지 않도록 하면서 당시 미군의 희생에 대하여 미국내 여론이 나빠진 것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군을 끌어 들여 베트남인들과 국제여론의 공격목표를 분산시키고, 전쟁과정에서 한국군이 미군을 대신하여 나서도록 하는 전략으로 바뀌어 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국군의 파병을 결정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보장받아 이를 기반으로 하여 경제발전에 재정을 돌렸다고 하나, 결국 한국의 젊은이들을 남의 전쟁에 용병으로 넘긴 결과가 되었다고 하겠다.

하여, 애초부터 그럴 이유가 없었던 일에 끌려 들어가게 된 국제적인 정황, 즉 한국과 미국의 힘의 관계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이 파병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작전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 만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독립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투쟁을 좌절시키는 일에 한국군이 이용되었고, 이들의 저항에 대하여 총칼로 응답하고 만 것이다. 양민학살과 관련한 우리의 책임이 분명 있으나, 이는 결국 미국의 전략이 그 기본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정확하게 따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한-미 관계의 불평등성과 일방적 성격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베트남 전의 문제는 이렇게 우리에게 베트남에 대한 사과와 함께, 미국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동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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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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