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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부전공을 이수했습니다. 주위 분들은 영문학공부나 제대로 하라며 별로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저는 전공인 영어영문학보다는 부전공인 법학이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영어영문학과는 영어보다는 문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공부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영문학의 고전을 읽고 문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듣다보면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황당하다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 것이 저에게는 문학적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법대에 가서 공부를 해보니 왜 사람들은 법이 따분한 학문이라고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제게는 재미있더군요.

그래서 부전공자에게 부과된 필수이수과목 이외에 꽤 많은 과목들을 수강했었고 한때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었지만 마음 편히 공부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법공부에도 난관은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한글세대여서 한자라고는 제 이름 외에는 자신이 없고 전공도 서양학문이어서 한자 실력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토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자일색인 법학교재를 읽어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는 시험답안지도 한자를 최대한 많이 구사를 해야 그럴 듯한 점수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들은 소문에 모 교수는 한글이 많이 적힌 답안지는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다고 하였으니까 제가 한자공포증을 느낄 만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만난 책이 "배종대"의 "형법총론"입니다. 이 교재로 형법을 강의하신 분은 나이가 지긋이 드신 교수님이셨는데 정말 보기 드문 독특한 필체를 쓰셔서 익숙해지지 않으면 흑판에 뭐라고 쓴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 자필로 된 프린트 물은 제게 휴지나 다름없었던 거죠. 급기야 법대에 "암호해독반"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무척이나 완고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하튼 그 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한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이 책을 교재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제게는 보통 행운이 아니었죠. 이 책은 여러 모로 독특하고 파격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92년은 그러그러했습니다. 우선 이 책은 다른 법학교재와는 달리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로 쓰여져 있어 누구라도 읽는 데에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아마도 법학교재에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일본말들"이나 "고쳐야 할 한자말투" "입말(구어체)과 글말(문어체)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것은 당시로서는 이 책이 유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배종대 교수는 "이오덕"의 "우리 글 바로 쓰기"(한길사)를 참고해 어려운 한자말투를 통렬히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또 숨도 쉬지 않고 어려운 한자투성이의 판결문을 읽어나가는 판사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대법관님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인이나 자녀들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까?"

또 배종대 교수는 이 책에서 이른바 교과서범죄라는 것을 비판하였는데 교과서 범죄는 교과서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고 형법학자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범죄를 말합니다. 가령 1991년 제 33회 사시 2차 시험문제를 예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갑은 평소에 원한이 있던 을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박 중이던 을소유의 선박에 휘발유를 끼얹은 후 지나가던 행인이 담배꽁초를 던져 불이 나기를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은 부둣가를 순찰 중이던 경비원 을에게 발각되었고 갑의 자백을 들은 병은 을 소유 선박의 화재를 다행히 막을 수 있었다. 갑의 죄책을 논하라"

위 문제는 다음과 같은 매우 희귀한 인과과정에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배종대 교수가 지적한 것을 나열해보면,

- 배가 얼마 만한 크기인데 휘발유를 끼엊을 수 있는가? 일부분에 뿌렸다면 어떻게 담배꽁초를 그 자리에 정확히 던질 수 있는가? 그는 박찬호인가?

- 부둣가에서 담배꽁초를 배에다 던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그것을 기다려 불이 나기만을 기다린다?

- 담배꽁초가 대포알인가? 바람도 불고 부두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배에다 어떻게 정확히 담배꽁초를 던질 수 있는가?

- 경비원을 따로 두는 배가 어디 그렇게 흔한가?

- 경찰도 아닌 병에게 갑은 자기가 감옥에 가게 될 일을 어떻게 순순히 자백했을까?

이렇게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미래의 법조인이 가장 비현실적인 케이스와 씨름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케이스에서는 예외 없이 사람을 갑을병정식으로 단순한 "범죄연출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이 법관이 되었을 때 인도주의(人道主義)를 제대로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죠.

다행이 요즘은 국내외 모두 이러한 법조계의 권위주의가 많이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법조인이 사용해왔던 치렁치렁한 가발을 더 이상 착용하지 않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의상이나 용어가 상당히 편하고 쉬운 것으로 바꿔져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어려운 법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법률가요"를 수록한 인터넷사이트도 등장하고 있으니까 여간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는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0년전에 이미 법학교과서라는 파격적인 형태를 통한 배종대 교수같은 분들의 진취적인 노력덕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에서도 빛나지만 이 책이 출판된 연도(1992)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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