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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구두를 닦고 있는데 후안이 찾아왔어. 나에게 뭘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물론, 구두를 닦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자기와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내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내가 '목욕이나 하고' 했더니, '안돼, 지금 당장'이라고 하더군. 결국 후안이 하도 닦달을 하는 바람에 구두에 먼지나 좀 털고 세수나 간신히 한 다음에 따라나섰어.

스튜디오에는 이미 몇몇 친구들이 와 있었지. 루벤이 피아노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는 걸 보고는 연주를 시작하더군. 따디 따디 따따디…. 그래서 나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쥐 한 마리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네. 그리고 친구쥐는 옆에서 북을 치고 있지.'"
- 이브라힘.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중에서 -


혁명 이전, 미국 뒷마당의 환락가였던 시절 쿠바 최고의 밴드였던 '부에나비스타소셜' 멤버들이 다시 모이는 순간이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미국 손님들이 끊기면서 일자리를 잃은 이 음악가들은 '구두를 닦고 복권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무려 오십여 년이 지나서야 모인 순간, 이들은 어떤 불평이나 하소연이나 인사말도 늘어놓을 틈 없이 쪼그라든 입술과 까만 부지깽이처럼 말라붙은 손가락을 놀려 노래를 연주한 것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뒤늦게 비디오로 챙겨봤다. 반세기를 지하수처럼 흐르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서울 구경 처음 온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며 '큰 게 장땡(Size does matter)'이라고 적힌 우악스런 영화(고질라) 광고 입간판 밑을 지나쳐 카네기홀까지 올라선 여남은 명 노인네들의 이야기가 열대야의 짜증스런 열기를 숙연하게 식혀주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녀석이 있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엉뚱하게 늦바람이 나서 밴드를 한번 해보겠다고 설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소박하게 꿈을 꿔, 무료 공연 한 번만 해본 다음에 해산하자고 다짐을 해도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내 주제에 기타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가당치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드러머로 내정된 친구도 드럼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만일 탄생했다면 '졸면죽는다 밴드'였을 그 계획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때 유일하게 악기를 제대로 다루던 것은 베이스기타를 맡은 친구였는데, 한번은 그 친구가 다니던 음악학원의 정기발표회를 보러 갔었다.

학원에서 파트별로 실력이 좀 된다는 아이들이 임시밴드를 만들어 '비틀즈', '본조비', 그리고 그때 인기 있던 '라디오헤드' 등의 노래를 몇 곡 카피해서 연주했고, 꽤 많은 고등학생 팬들이 꽃다발까지 제법 갖다 안기는 성황 속에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그 발표회장에서도 베이스기타를 연주한 내 친구는, 아마 그 학원에 집어넣을 욕심이라도 있었는지 나를 붙들고 늘어진 끝에 뒷풀이에 합류시키고야 말았다. 그래서 산본에 있던 집으로 가는 전철을 놓치기 십상인 청량리역 앞에서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발표회의 성공으로 기분이 좋았던 원장이 계산한 산낙지와 소주로 꽤 푸짐한 술상이 차려졌다. 혀와 입 속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빨판으로 빨아대는 산낙지를 힘겹게 씹어 넘기며 유일한 불청객이었던 나는 분위기에 묻어들기 위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은 없이 산낙지만 씹고 있는 그 녀석을 발견하고 나는 소주 한 잔을 권했다.

"소주... 한 잔 받을래요?"

꼭 영화 '초록물고기'의 송강호 비슷하게 뭉툭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빛의 그 녀석. 그 녀석은 받으라는 술은 안 받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얌마, 걔 미성년자야. 술 주지 마. 야, 너 술 받지 마, 알았지?"
"네. 저 술 안먹어요."

친구가 끼어 들어 내 술병을 빼앗았고, 아무리 어리게 봐줄래도 스물 다섯은 넘었다 싶던 그 녀석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표정으로 또 산낙지 한토막을 집어 씹었다.

"형. 말 놔요. 저 열여덟 살이에요."

그 녀석은 가수로 성공하겠다고 학교도 그만두고 나와 학원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 공업고등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얼마 전에야 마무리된 폭력사건이 시비가 되어 아예 그만두고 말았다고 했다.

폭력 전과자라는 얘기까지 듣고 보니 나는 옆에 앉아 술 마시기가 좀 조심스러워졌다. 그 녀석이 술을 안먹겠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음악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다가 감정이 격해져 술상이라도 엎으면 어쩌나. 또 '너 처음 보는데, 정말 재수없어'하고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 하면 어쩌나. 그런데 그렇게 쫄아들고 있는 내 마음은 아랑곳 없이 그녀석은 내 손가락을 끌어다 만지작거리며 혼잣말같이 지껄이고 있었다.

"와. 이거 기타용 손가락이네. 이거 완전히 쿡쿡 찌르는 손가락이야. 와."

기타를 치기에 가장 적합한 손가락은 'E.T'처럼 길고, 손끝에는 힘이 실리는 모양이어야 한다. 내 손가락이 대충 그렇게 생겼다. 그러니 손가락이 짧아 기타리스트는 포기하고 가수가 되기로 했다는 그 녀석은 내 손가락이 부러워 그렇게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녀석 손가락은 꼭 포동포동한 돌무렵 아기 손가락처럼 짧고 굵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술자리는 흘러갔고, 그 동안에도 우리는 술이 돌았으며 그 녀석은 술도 먹지 않고도 술자리와 밤의 분위기에 취해들었다. 우리의 대화도 '음악'이라는 추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에 안 맞게도 그 녀석에게 이런 말로 시비를 걸었다.

"야, 그래도 음악으로 성공하려면 대학에 가야 돼. 나한테 악기 가르쳐준 아저씨들, 밤무대 밴드에서 이삼십 년씩 활동해서 연주는 진짜 죽여주지만 아직 악보도 제대로 못 봐. 그래서 작곡도 안되고, 뭔가 창조적인 게 안되는 거라구. 사람들 취향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 머리 굴린 애들은, '아, 지금은 이런 노래가 뜨겠구나'하는 감각도 빠르고, 더 똘똘하게 한다구. 그러다가 대학가요제에서 아무 거나 상만 받아도 바로 가수 되는 거야."

이 말을 듣고서, 걱정했던 대로 그 녀석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형.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서울대 나왔다는 '공○○○'를 봐요. 걔들, 정말 똘똘해서 인기도 좋고 그렇지만, 걔들은 절대 음악가나 예술가가 아니에요. 걔들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 거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도 많이 따라 부르고 하지만, 걔들 노래는 들어도 가슴에 '팍' 오는 게 없어."

"나는 이거 아니면 죽는다, 이런 생각으로 산다구. 그래서 내 노래하고 걔들 노래는 다르단 말이야. 형이 창조적인 것하고 작곡을 못한다고 그랬지만, 똑같은 곡도 취미로 하는 애들하고 깡으로 하는 사람이 연주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구. 그게 음악이야. 노래는 짱구가 아니고 깡이야, 깡."

그 녀석은 눈은 살벌하게 치켜 뜨고 손으로 식탁을 쾅쾅 내리쳐가면서 악을 쓰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내가 '음악은 Feel이죠'하고 한마디 늘어놓으려 할 때 벌어진 돌발적인 대화였다. '딱 그려지고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고 소리내는 것은 기계일 뿐이다. 작곡가는 작곡가대로, 편곡자는 편곡자대로 만들어놓은 음악을 최종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창조해서 소리내는 뮤지션. 특히 밴드의 각 파트들. 그렇게 음악은 감성과 느낌이 저마다에 의해 창조되고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시에 음악은 느낌이나 창조가 아닌, '깡'이 되어버렸다. '깡패같은 고삐리', 아니 '고퇴생' 때문에 말이다.

"형. 이 산낙지가 말이야. 손발이 다 잘라졌어도 이렇게 살겠다고 내 입에 매달리거든. 기타치는 사람 손도 이 산낙지처럼 제 혼자 움직이잖아. 자다가도 딱 무슨 노래 들으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말이야. 이게 꼭 무슨 창조인가? 다 깡이야, 깡. 딱 달라붙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덤비다보니까 그냥 배어버리는 거. 나도 이 낙지 빨판처럼 살거야."

다행이 조금 낮아지는 목소리로 그녀석은 다짐하듯 뇌까리며 빨판이 촘촘한 낙지 다리끝살을 씹었다. 마치 천재의 뇌를 씹으면 천재가 된다고 믿었던 식인종처럼, 그녀석은 산낙지에게 '나도 너처럼 살게'하며 입 속의 그것과 소통하는 듯했다.

그래서 사실은 좀 민망하게도 어린 놈 큰소리에 눌리기도 했지만, 또 한쪽으로는 '그것도 참 말 되네'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Feel'이니 하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히딩크 감독은 '즐겨야 진지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장난처럼 즐기라는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안되면 말고'하는 식으로 즐기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불평하지 말고 대범해지라는 얘기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요 자세일 것이니.

우리 말로 하면 '좋은세상 밴드'쯤이 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노인들과, 송강호를 닮았던 그 녀석의 얼굴이 한데 섞여 떠오른다. 카네기홀 공연을 마치고 '지금처럼, 살아있고 싶다'고 말했던 늙은 악사처럼,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그 녀석도 삶을 즐김으로써 진지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을지.

초장이 쓰려 요동치면서 입천장에 들러붙는 산낙지로 노래와 삶의 상징을 삼았던 그 녀석. 청량리 음악학원의 그 녀석은 '깡' 앞에 흔히 놓이는 폭력성과 무모함의 함정을 무사히 넘어 노래와 삶을 즐겨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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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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