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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가 아니라도, 혹은 먹는 것 남기면 다시 태어날 때 어떻게 된다는 노인네들 악담 때문이 아니라도 음식 귀한 줄은 알고 살 일이다. 자본과 문화와 권력으로 부풀어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서의 인간관계도 따지고 보면 '입은 많고 먹을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을 생각이 없거든 애초에 밥그릇에 담지를 말자고 다짐은 하고 산다만, '먹을 만큼만 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원래 스스로 느끼는 시장기나 식욕이란 것이 과장되어 있기가 쉽지만, 또 팔려고 만들어놓은 음식의 때깔은 능란하게 맛을 속이기도 한다. 그래서 맛도 보지 못한 음식을 겉모양만 보고 '먹을 만큼만'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중학생 시절, 서울이라고는 해도 모든 종류의 유행이 반 박자 느리게 울리던 변두리의 친구들은 가끔 누군가 전해오는 명동이나 강남의 소식을 화제 삼곤 했었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고 여분으로 주어진 오후시간을, 계집애들은 어디 백화점에도 놀러 다니면서 눈을 즐기기도 하고 또 머슴애들은 대학로 구경이라도 다녔지만, 개중에도 촌스럽던 내 친구들은 그저 먹는 일이나 되어야 귀를 열었다.

그 어느 날 한 친구가 전한 소문이 꽤 입맛을 당겼다. 명동에 '분식뷔페'가 생겼는데, 그곳에서는 입장료 천 원만 내면 튀김이니 만두니 김밥이니 하는 분식요리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학교 앞에서는 꽤 푸짐한 떡볶이 1인분이 삼 백 원이었으니 천 원도 절대 작은 돈은 아니겠으나, 한 개 오십 원 하던 만두 스무 개만 먹어도 천 원은 빠질테고 백원씩 하는 튀김이나 찹쌀 도너츠도 섞어 넣으면 본전은 더 쉽게 찾아질 터였다. 게다가 수정과나 화채 같은 마실 거리까지 곁들이게 된다니까, 아무래도 남는 일이었다.

"우와, 되게 좋다. 가자, 우리."
별 이론의 여지없이 우리는 합의했고, 아마 무슨 시험이 끝났을 그 다음날 우리는 각자 차비와 분식뷔페 입장료로 한 이천 원 씩 준비해서 명동으로 떠났다. 물론 시험을 망친 친구도 있었겠지만, 먹으러 가면서까지 얼굴 구길 만큼 소심한, 혹은 열의 있는 녀석이 내 주변에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 아침부터 굶고 벼른 놈도 분명히 끼어있었을 그 비장한 출정의 길, 버스 안에서 애초의 제보자는 공중낙하 직전의 공수교관처럼 엄숙하게 주의사항을 전파했다.
"그런데, 이건 꼭 알아야 돼. 얼마든지 먹는 것은 자유지만, 절대 남겨서는 안돼. 남기면 벌금이 천 오백 원이야."

입장료보다도 많은 벌금. 천 오백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 먹으면 될 것 아닌가?

"다른 사람 것 먹어주면 안 되는 건가?"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됐어. 다 먹을 만큼만 덜어서 먹고, 혹시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먹어주면 되잖아."
"그래, 그래."

한 바구니라도 먹어치울 것 같은 식욕에다가, 결정적으로는 대여섯 되는 패거리에 대한 뿌듯한 믿음으로 우리는 자신만만했다. 그렇게 우리는 명동에 내려섰고, 길잡이의 뒤만 따라 두 블럭 정도 헛다리품을 판 끝에 분위기 험악해지기 직전 그 분식뷔페를 찾아 들어섰다. 알고 보니 그 제보자도 소문만 듣고 무작정 우리를 끌고온 터였다.

"야, 맛있는 것만 담아. 그리고 너무 많이 담지 말고."
또 누군가 주의를 주었지만, 우리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야, 걱정 마, 걱정 마. 남으면 내가 다 먹어줄께."

정말 듣던대로 그곳은 분식의 천국이었다. 항상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주머니 속 동전 몇 개를 달그락거리며 고민해야 했던 모든 메뉴가 내 손앞에 친절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우선 달콤한 설탕시럽에 고구마를 조린 마탕과 고추장이 맛깔스럽던 떡볶이, 그리고 일단 본전 천 원을 넘길 만큼의 김밥과 만두, 도너츠와 튀김을 차곡차곡 쌓아 담았다. 다른 녀석들도 대충 그랬다. 누군가는 '삼백 원, 사백 원'하고 값어치를 세어가며 뭔가를 열심히 담기도 했다. 그 때 특히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닭다리 튀김이었다.

그 때는 부위별로 따로 잘라서 파는 치킨은 없었다. 닭이라면 그저 가게 밖에 주렁주렁 매달려 전시되어있는 털 뽑힌 생닭을 즉석에서 기름 솥에 넣어 튀겨주는 '통닭'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름배인 노란 종이봉투를 찢어내고 둘러앉은 형제들끼리 통닭 한 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항상 다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맛도 없는 팍팍한 가슴살을 덤으로 먹는 인내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한 쪽은 잘록하고 다른 한쪽은 두툼한 닭다리튀김이 노릇노릇 빛깔도 좋게 한 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개든 세 개든 집어가라는 듯이 말이다. 크기가 조금 아담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는 통닭을 먹자면 대여섯 마리는 먹어야 차지하게 될 닭다리 대여섯 개를 접시에 올렸다.

이윽고 저마다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나름대로 욕심껏 꾸민 접시를 안고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서로 흐뭇한 얼굴을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화채도 제법 시원했다. 워낙 대량으로 준비해놓은 탓에 만두나 튀김에 바삭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각자 본전 두세 배는 챙겼다는 뿌듯함이 향료가 되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워나갔다.

그런데 내가 비장의 닭다리를 하나 집어드는 순간, 사건은 발생했다. 속에 뼈가 들어있다면 꼿꼿하게 잡혀야 할 닭다리가 발목부터 힘없이 부러지면서 축 쳐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부러진 면으로 삐져나오는 하얀 살과 잔가시들. 그것은 닭다리가 아니었다. 노란 튀김옷을 입고 내 눈을 홀린 그것은, 그제야 알고 보니 붕어튀김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방 동그란 모양이어야 할 닭다리보다는, 한쪽에서 눌러놓은 것처럼 납작한 모양. 다리뼈라기에는 땅딸막한 길이. 분식 집에서 붕어튀김을 내놓으리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착각을 했지, 알고 난 뒤에 보기에 그것은 멀쩡한 붕어튀김이었다.

통째로 튀긴 붕어 대여섯 마리를 남김없이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 반찬도 아니고 붕어 살만 씹어대기도 황당했지만, 그 엄청나게 뒤섞여 있는 잔가시가 시도 때도 없이 잇몸에 와서 박혔다. 남는 것이 있으면 같이 먹어주기로 했던 친구녀석들은 일찌감치 입을 닦고 화채를 마시고 있었고, 또 개중 얄미운 놈들은 내 붕어튀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탕이니 튀김이니 더 집어다가 아직 남은 뱃속을 채우기도 했다.

벌금으로 낼 천 오백 원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나는, 결국 붕어 대여섯 마리를 다 먹고야 말았다. 당황스럽고 분한 마음에, 그리고 예상 밖의 과식에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에는 언제 걸렸는지 붕어 가시 몇 개가 부대꼈다. 그리고 뱃속 어디에선가 비릿한 트림은 끝도 없이 솟았다.

내 뱃속이야 어쨌건 자기들 뱃속만 뿌듯하고 달콤한 어느 친구녀석은 명동성당에 놀러가자고 했다. 또 어떤 녀석은 과감하게 남산 타워로 가자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더운데 집에나 가자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고, 괜히 분위기 서늘해진 패거리는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길에서도 맨 뒤 긴 의자에 모여앉아 수선을 떠는 친구놈들이 보기 싫어 나는 안내양 뒷자리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혼자 분을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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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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