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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은 스프였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먹어보았다는 사람의 증언조차 들어보지 못한 음식. 그래서 그 맛에 대해 대충이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완벽한 환상 속의 음식. 스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부모님이 저녁 예배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일요일 저녁, 우리 삼남매는 TV 앞에 나란히 누워 '사랑의 유람선'이나 '부부탐정' 같은 외화를 보곤 했다. 외화 속 주인공이 나른한 기지개를 켜는 아침 침실, 혹은 연인들이 만나는 포근한 저녁 식탁으로 단정한 웨이터가 들고 온 접시에서 커다란 은빛 뚜껑을 벗겨내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 얼핏 보이던 맛깔스런 스프 한 접시.

우리로 치면 국에 해당한다는 큰누나의 해설이 있었지만, 주인공이 스푼을 들어 되직하게 떠올리는 모양을 보면, 매일 우리 식탁에 오르는 말간 콩나물국 따위와는 분명 달랐다.

또 얼핏 모습만 보면 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닭고기 스프, 쇠고기 스프, 크림 스프 등등 곁들여지는 이름만 들어도 그건 죽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혹시 전복죽이라든가 하는 그럴 듯한 죽을 먹어보았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 무렵 내가 아는 죽이란 할머니가 몸살 났을 때 맛볼 수 있는 흰죽(미음) 아니면 가끔 저녁 밥상에 밥 대신 놓이던 아욱죽 외에는 없었다.

하다못해 짜장면만 되더라도 어쩌다 한 번 얻어 먹어본지라 맛이 어떻고, 어디서 파는지도 알기에 가끔 한 번 먹으러 가자고 조를 수나 있었지만 스프는 영 막막했다.

도대체 그 음식이란 이담에 커서 미국에 가보기 전에는 맛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랑의 유람선이건 부부탐정이건, 스프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군침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큰누나는 너무도 쉽게 나의 꿈을 이루어주겠노라고 말했었다.
"스프 먹고 싶다고? 누나가 스프 만들어줄까?"
"누나가 스프를 만들 수 있어?"
"그럼."
"어떻게?"

"라면에 스프 들어있잖아. 그거 끓이면 저렇게 돼."
"거짓말. 저기 나오는 건 쇠고기 스픈데?"
"그래. 이 라면 이름도 쇠고기 라면이잖아."

정말 연결이 되지 않는 그림이었지만, 또 듣고 보니 어찌어찌 그럴 듯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두 가지는 정확히 '스프'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쇠고기 라면에 들어 있는 쇠고기 스프. 설득력이 있었다.

큰누나는 멀쩡한 라면 봉지 하나를 뜯어 스프만 냄비물에 풀어 끓이기 시작했다. 매콤한 고춧가루내가 훅 끼치는 붉은 냄비. 그렇지만 언제나 밥을 말아먹던 라면 국물과 TV 속 걸쭉한 쇠고기 스프는 모양이 아무래도 다를 것 같았다.

"누나. 정말 이 라면 스프가 테레비에 나오는 그 스프하고 같은 거야?"
"그럼."
"근데 테레비에 나오는 거는 끈적끈적하던데?"
"이것도 한참 끓이면 그렇게 돼."

큰 누나는 선생님인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보다는 네 살이 많았다. 그래서 어쨌건 국민학교 고학년이라 아는 것도 많았지만, 실제 아는 것보다 많은 것에 대해 가르치려고 했다. 나와 작은 누나에게.

물론 그것도 지금 생각이지, 그때는 그저 믿고 존경하던 때였으니 나와 작은 누나는 물론 그 라면국물이 멋진 쇠고기 스프로 변신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국물은 팔팔 끓어올랐고 거품은 뚜껑을 밀쳐 올리려고 요동을 쳤다. 큰누나는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젓더니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뭔가 생각대로 되어간다는 듯 지금의 현상에 대해 설명했다.

"수분이 많이 증발해야 끈적끈적하게 되거든? 이렇게 팔팔 끓여서 거품이 많이 나면 거의 완성이 된 거야."
"그럼 얼마나 있으면 돼?"
"한 10분만 있으면 돼."

그런데 10분이 넘게 지나가고, 스프는 그렇게 끓어올라 뚜껑을 밀쳐 올리기를 몇 차례를 반복해도 별로 걸쭉해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쯤에서 큰누나는 또 다른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만화 같은데 보면, 마녀들이 두꺼비 스프를 끓이거나 가가멜이 스머프 스프를 끓일 때 계속 저어주잖아. 이것도 그렇게 계속 저어줘야 해."

그래서 가스 렌지 앞에서 졸린 강아지처럼 두 손 위에 고개를 기대고 기다리던 나와 작은 누나는 일어나 번갈아 냄비 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젓지 않는다고 해서 바닥에 가라앉아 탈 무엇도 없는 밋밋한 국물.

더구나 젓던 숟가락으로 가끔 떠서 맛을 보면 더 짜고 매워질 뿐, TV 속 은접시에 담긴 우아한 음식으로 가까이 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밀려들었다. 물론 끝까지 자신만만한 큰누나의 얼굴을 보면 또 혼란스러워졌지만.

물론 한참을, 아마도 몇 십 분을 끈기 있게 끓였어도 라면국물은 쇠고기 스프가 되지 못했고, 볶이다시피 한 고춧가루 양념의 매운 냄새만 진해져 갔다. 그리고 아마도 부모님이 돌아오실 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스프 가루도 뿌리지 않은 싱거운 생라면 조각을 씹으며 스프를 맛볼 꿈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아마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겠지만, 큰 누나는 알뜰하게 냄비 설거지를 했다.

내가 처음 TV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스프를 맛본 것은 그로부터 한두 해 뒤였다. 공돈 몇천 원이 생긴 엄마는 양식집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날 시키지도 않았는데 딸려나온 크림스프를 처음 맛볼 수 있었다. 이름이야 같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모양과 맛에서 라면국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달콤하고 맵지 않은 크림 스프.

그때 경양식집 높은 의자에서 두 다리 달랑거리며 칼질을 할 때 속으로는 집에 가면 큰 누나를 망신 줘야겠다고 벼르기도 했었는데, 이제 생각이지만 그 새 그걸 잊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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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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