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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하시는 말씀 중에 '곡식이 흉년이면 도토리가 풍년 든다'는 말이 있다. 가을이 오면, 참나무는 산 위에서 저 아래 들판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혹 흉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하겠거든, 사람들 이거라도 많이 먹고 굶어죽지 말라고 도토리를 잔뜩 열어준다고 한다.

참나무가 많은 시골학교 사택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에서는 해마다 도토리묵을 쑤었다. 묵을 쑤는 것이야 어머니 몫이지만, 아침 저녁 집 근처 야산과 학교 건물 주변을 훑으며 도토리를 주워 모으는 것은 모든 가족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저 숲속을 헤매면서 줍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시설 일을 보시던 아저씨가 시간이 나서 나무 위로 올라가 장대로 여기저기 때려주면 도토리알이 한창 떨어질 때는 잠깐 물러섰다가, 장대질이 멈추면 달려들어 주워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끔 한 박자 늦게서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굵은 놈이 정수리를 때리면 한동안 눈도 못 뜰 지경으로 아프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비닐 하우스에 부딪치는 소낙비 소리마냥 후두둑 후두둑 묵직하게 떨어지는 맛이 있어야 주워 모으기도 재미가 있다.

그렇게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까지 한 달 정도 모으면 도토리가 한두 가마는 되었던 것 같다. 모은 도토리는 물을 채운 커다란 고무 함지에 며칠 담가 두었다가 꺼내 말린다.

한 사흘 잘 말린 도토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깔아놓고 보도블럭으로 문지르면 '자작 자작' 군밤 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한 속살을 드러낸다. 잘 여물어 속껍질까지 벗긴 도토리 속살은 생긴 것도 꼭 잘 구워진 군밤처럼 따뜻하고 맛깔스런 빛이 돈다.

내가 개입하는 공정은 대개 여기까지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 도토리알을 방앗간에서 가루로 내어 가라앉히고, 녹말 가루로 만들어 묵으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낸 도토리 묵은 우리 식구들의 별미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맞이를 위한 믿음직한 준비물이었다. 무슨 가족 잔치부터 시작해서 소소한 생일파티, 모임, 혹은 그저 잠시 들른 손님들에게도 도토리묵은 커피보다 즐겨 내놓는 우리 집의 단골 음식이었다.

널찍한 접시에 똑똑 썰은 도토리묵 두 줄 늘어놓고 다져진 파, 마늘, 고추 따위가 뒤섞인 양념간장 두어 숟가락 두르면 그 생생하고 맛깔스런 기운이 같이 얹은 쑥갓향긋한 향에 실려와 침샘을 자극한다.

그런데 하루는 눈치도 상식도 없는 손님이었던지, 잘 먹어 놓고는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진짜 도토리묵 아니죠?"
"예? 왜요? 이거 진짜 도토리묵 맞는데…."
어머니는 맛이 없었나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끝까지 흐리면서 되물었다.

"제가 산골 출신이라서 어려서부터 도토리묵은 많이 먹어봐서 알거든요. 그런데 진짜 도토리묵은 좀 씁쓸하고 떫고 그래야 되는데, 이건 매끈하잖아요. 이거는 가짜예요. 이거 가루 사오신 거죠?"
"예? 아닌데, 이거 요 앞에 운동장이랑 야산에서 직접 주워다가 갈아서 만든 건데요?"

싱글싱글 웃으며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한 달은 넘게 동원되어 줍고 말리고 까서 가루를 내고 묵을 만드느라 적잖이 고생했던 온가족이 황당스러워하면서도, 또 선뜻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진짜 도토리묵은 떫어야 한다.' 그것도 그냥 듣기에는 일리가 있다. 껍질 벗긴 도토리가 하도 노릇노릇하고 맛있게 생겨서 한 번 씹은 적도 있었지만, 과연 쓰고 떫었다. 도토리가 원래 생긴 것과는 다르게 그런 맛의 열매다. 그렇지만 그 묵은 우리가 직접 주워 모아서 갈고 가루로 내어 만든 것이 아니던가?

어머니도 원래 만들 줄 알던 묵도 아니고, 주변에 도토리가 많다보니 한 번 만들어보자 하고 물어물어 터득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자신있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야 대충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옛날에는 가루로 묵도 만들고 떡도 만들어 밥을 대신하던 것이라 많은 양을 내는 것이 급했다. 그래서 껍데기도 벗기지 않은 채 갈아서 대충 걸러내고 가라앉혀 모두 묵이나 떡을 하는 데 썼었다고 한다. 그래서 묵에서는 쓰고 떫은 맛이 투박하게 많이 났고, 또 묵의 질도 좀 되고 빛깔도 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끼니거리보다는 별식이 되다보니 정성껏 속껍질까지 벗겨내 거르고 걸러 고운 가루를 얻어 쑤다보니 빛깔도 맑아지고, 원래 도토리의 씁쓸한 향이야 남았겠지만 입 안에 깔끔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옛날 고향집 묵맛만 기억하는 사람들 입맛을 속이려고, 어느 유원지 막걸리집들은 일부러 묵에다가 떫은 맛과 탁한 빛깔을 내는 화학재료를 넣기까지 한다니 진짜와 가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천박하고 얄팍한 새것으로나마 옛 것을 되살리는 것이 장사가 될 때가 있을 만큼, 궁하던 시절 기억이 엉뚱한 미각을 자극해 별미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리밥이 그렇고 수제비나 비지나 칼국수가 또 그렇다. 또 보리개떡이 그렇고, 이런 저런 불량식품들도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별미가 되는 것이 떠올리면 푸근한 추억 덕분이지, 어디 독특한 재료나 양념 때문이랴?

지금이야 그저 그렇게 추억양념으로 즐기는 별미일 뿐, 궁하다 궁하다 해도 도토리 힘까지 빌 것은 없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빈자리가 꽤나 허전하고 나서야 도움이야 되건 말건 잔소리꾼 노인네 한 분이 마음 듬직했음을 깨닫듯이, 또 가끔은 옛말 떠올리며 바라보는 산마루 참나무들이 듬직하다.

이치야 어떨지 모르지만, 들판에 곡식보다는 빗물에 쓸려온 모래흙이 그득한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냥 생각에는 곡식 쓸려가고 떨어진 만큼 도토리 깍지도 비는 것이 당연할 것도 같고, 혹 풍년이 든다 한들 그렇다고 도토리를 쌀 대신 먹을 사람도 없을테지만, 또 가끔 힘든 삽질 중간중간 허리 펴고 멀찍이 산마루에 참나무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나 조금 푸근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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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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