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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업씨.(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늘에서야 봉투를 뜯었습니다. 만 천원이 들어있더군요. 지난 금요일(13일) 제가 한 법정의 증인으로 선 대가로 서울지방법원이 지급한 여비입니다.

저는 검찰측 증인으로 서울지방법원 형사 제524호 법정에 섰고, 제 뒤에 앉아있던 피고인은 다름아닌 김대업씨였습니다. 검찰은 지난 대선 때 저의 취재원이기도 했던 김씨의 명예훼손 혐의를 증언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오마이뉴스> 병역비리특별취재팀장이었던 제가 "전태준 전 의무사령관이 신검부표 파기 지시했다"(<오마이뉴스> 지난해 7월 보도)는 의혹을 보도한 것은 김 씨의 발언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밝혀내자는 것이지요.

이날 오후 2시30분경부터 시작된 '전태준 전 의무사령관 명예훼손건'에 대한 증인심문은 40여분 진행됐습니다. 김대업 변호인측은 당시 <오마이뉴스> 기사는 민주당 신기남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이틀전에 미리 입수해 보도한 것이라고 강조했고, 검찰측은 신기남 의원의 대정부질문보다 김대업씨의 발언 때문에 기사화한 것이라면서 김씨의 '주도적 역할'을 강변했습니다.

'슬리퍼 논쟁'으로 잦아든 '병풍'

이렇듯 지금까지 진행된 공판 내용은 대부분 당초 김대업씨가 제기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전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와는 동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공판에서는 김대업씨가 지난 2001년 1월 김길부 전 병무청장과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만났을 때 "골덴 바지를 입었는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가", "라운드 티를 입었는가"라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씨가 수감자의 신분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수사 보조원으로 있을 때 수사관 행세를 하면서 공무원을 '사칭'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서죠.

물론 현재 김대업씨의 '범죄 혐의점'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논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시시콜콜한(?) 논쟁을 다시 되씹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이기에 이에대해 감 놔라 배 놔라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날 공판에서 "증인이 쓴 그 기사는 김대업씨의 말에 따른 것 아니냐"며 저를 다그치는 검사의 말을 들으며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떠올렸다면 법정모독이라고 볼 수 있나요.

이 사건의 거대한 몸통이라고 할 수 있는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는 삭뚝 잘라버리고, 김대업씨가 '슬리퍼를 신고 있었나'라는 것을 주요 쟁점으로 만든 검찰의 황당함 때문입니다.

왜 기자가 황당해하는지, 잠시 과거 자료를 한번 들춰볼까요.

전 병무청 고위간부 K(김길부 전 병무청장)씨가 올 1월 서울지검 병역비리 수사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지난 97년 7월 정연씨의 병역의혹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병무청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은 이회창 후보의 K(고흥길) 특보이다. 이어 신한국당의 J(정형근) 의원도 병무청으로 찾아왔다. 병무청쪽에서는 나와 Y(여춘욱)씨, 한나라당쪽에서는 K 특보, J 의원 등이 97년 7월말 국회에서 이정연 씨의 병적기록부를 공개하기 직전에 5∼6 차례, 그 뒤로 1∼2차례에 걸쳐 힐튼, 하이얏트 호텔 등지에서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12일 <오마이뉴스>가 김대업씨의 제보를 받아 최초로 보도했던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 의혹 제기 내용 중의 핵심부분입니다. 이같은 '폭탄진술' 직후 김길부씨는 한 변호인과 접견하고선 입을 닫아버렸다는 것이 당시 기사의 골격입니다.

김대업씨는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를 귀신에게서 들었는가

▲ 병역비리 수사 결과발표 자료.
이로부터 5개월 뒤인 10월 24일, '병풍'에 대한 수사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검찰은 이례적으로 당시 김 전 병무청장이 만나고 다닌 인사들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습니다.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 김광일 당시 청와대 정치특보, 정형근·고흥길·황우여·박세환 의원…."

검찰 관계자는 그 뒤 '은폐대책회의' 의혹과 관계된 인사들과의 만남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해명했습니다.

"1> 김길부씨가 권 전 안기부장을 만난 것은 (97년) 6월말, 7월 초이고, 김씨가 유럽순방에 앞서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2> 97년 8월 김광일 특보를 여춘욱 징모국장과 함께 만나, 병적표에 말썽이 난 이유를 설명했다.

3> 힐튼호텔 커피숍에서 김길부씨는 여춘욱씨와 함께 고흥길, 황우여 의원과 성명불상의 변호사를 만나 병적표 공개 문제를 상의했다.

4> 고흥길 특보가 97년 6월 병적증명서 떼러 병무청 갔다가 여춘욱이 '본인이 서울청에 신청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여씨가 김길부씨를 인사차 소개한 것이다.

5> 이밖에도 최병렬 8월초, 박세환 8월 중순, 정형근도 병무청에서 만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제보했던 김대업씨가 어떻게 김길부 전 병무청장이 만나고 다닌 사람들과 구체적인 장소까지 알 수 있었을까요. 김대업씨 말처럼 김길부 전 병무청장이 수사과정에서 '폭탄진술'을 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김길부 전 병무청장은 당시 더많은 여권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당시 검찰관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은폐대책회의라고 볼 수 있는 만남은 없다."

또다른 검찰 관계자는 '대책회의 관련자들 다 조사한거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중요참석자는 다 조사했지만 고흥길, 정형근 의원은 확인된 게 없다. 지금 상황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조사가 쉬운 게 아니다, 이회창 후보도 있고 그렇지 않은가"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 이정연씨를 소환 조사해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소환통보 자체가 수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김대업 공판장을 메운 '창사랑' 회원들
한나라당이 아직 김 전병무청장 주변 맴도는 이유

지난 5월 16일 김길부 전 병무청장도 내가 섰던 증인석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날도 '은폐대책회의'에 대한 질문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김대업씨와 김길부씨가 처음으로 마주앉았을 때 '어떤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가 주요 논점이었죠.

이날 김길부씨의 증인심문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평시와는 달리 방청석을 가득메운 40-50대의 낯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공판을 마치고 로비로 나오는 김대업씨 변호인인 최재천 변호사에게 큰 소리로 한마디 하더군요.

"세상에 저런 사기꾼을 변호하는 사람이 제정신인가."

그들 중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어디에서 나왔냐'고 물으니 "나는 창사랑 회원이고, 저 아주머니들도 그렇다"고 답변하더군요. 이날 방청석에는 한나라당 법률지원단 구본근 부장도 나와있었습니다.

지난 대선때 김길부 전 병무청장과 '은폐 대책회의'를 벌인적도 없다고 강변했던 한나라당이 이날 바쁜 시간을 쪼개 공판장에 나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 김병기 기자
핵심 당사자들을 조사하지 않고도 김 전병무청장과 여권인사들의 만남의 성격조차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 검찰의 '직관력'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당시 현직 대통령의 두 아들까지 구속시킨 당당한 검찰이, 어떤 이유에서 대통령 후보 아들과 정치인들에게 소환통보조차 못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에 대해 이랬던 검찰이 김대업씨의 '명예훼손'과 공무원 사칭 등에 대해서는 김씨가 슬리퍼를 신고있었나, 운동화를 신고있었나조차 집요하게 캐내고 있습니다.

이런 검찰 앞에서 '검찰의 정치 독립'을 얘기한다면 우스개 아닐까요.

오늘, 며칠동안 잊고 있었던 봉투를 뜯으면서, 지난 대선 이후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김대업씨를 떠올렸습니다. '정치 검찰'이 제게 준 만천원의 돈을 만지작 거리며 김대업씨가 구속되면서 던진 뼈있는 말을 새삼 떠올립니다.

"나는 돈 없고,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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