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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미술가 그룹 ‘입김’ 회원들. 2000년 9월 유림들의 행사저지로 무산된 ‘아방궁 프로젝트’에 대한 ‘공연방해 배상책임’ 판결이 내려지자 자축행사를 열었다.
ⓒ 우먼타임스 장철영
2000년 9월 29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벌어진 여성미술가그룹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기억하십니까?


조선왕실의 사당이 있는 종묘가 유교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소외된 사람의 삶과 일상이 녹아있는 공간으로 '재탄생' 된다는 의미에서 종묘를 자궁으로 재구성,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이란 개념의 해방특구인 '아방궁'으로 조성한다는 취지의 입김 전시회가 '이조시대'의 후손인 전주이씨 종친회의 방해로 무산된 사건이었다.

이에 입김은 전주이씨종친회(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3년만에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지난 6월 3일 서울지방법원은 "헌법상 보장된 학문과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불법행위"로 규정, 전주이씨 종친회는 입김측에 8백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종친회 차원의 조직된 방해로 볼 수 없다"는 1심의 판결을 뒤엎는 결정이었다. 결국 법원은 여성미술가그룹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3년여를 끌어온 소송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500만 이씨의 대표체"라고 자처하는 전주이씨 종친회의 '파워'는 보이지 않게 드러났다.

2000년 12월 13일 첫 소송이 제기된 이 사건을 맨 처음 맡은 판사는 서울지법의 민사단독 이모씨. 담당판사의 본관은 전주이씨였다. 이 사건은 본래 2002년 1월 8일 선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모 판사는 선고를 미루고 '재판부 직권'으로 1월 18일 조정기일을 잡아 입김과 종친회에 합의를 종용했다.

하지만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입김측은 공개사과를 요구했지만 종친회측은 비공개로 당사자들에게만 유감을 표명하겠다는 수준에서 맞섰다. 특히 종친회측은 '대외공포 절대불가'라는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했다.

가문의 아들, '이씨' 판사들의 고뇌?

▲ "나라가 망조가 들었지. 어디에 치마를 내걸어."
ⓒ 오마이뉴스 이종호
조정에 실패한 뒤 이 사건은 다른 판사에게로 넘겨졌다. 그 과정에서 이모 판사의 고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안'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이모 판사는 "입김의 손을 들어주면 문중을 배신하는 거고, 또 종친회의 손을 들어주면 '눈치를 봤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므로 어떤 판결을 내리더라도 욕먹을 사건"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교체된 판사 역시 이씨였다. 입김측에는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전주이씨종친회 차원의 '조직적' 방해가 있었다는 점, 즉 전시회를 위해 설치된 작품들을 밟고 찢는 등의 훼손행위가 종친회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없었던 것.

하지만 종친회의 실수(?)로 그 입증은 가능해졌다. 종친회측은 종로경찰서(당시 경찰은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것을 우려, 현장에 나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그 내용을 기록해 두었음)에 사실조회를 신청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입김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작용했다.

상황은 거의 입김쪽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판사 역시 조정위원회를 열어 선고를 미뤘다. 역시 조정은 실패했다. 입김측은 공개사과 없이는 어떤 합의도 불가능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심은 '종친회 승(勝)'이었다. 재판부는 "불법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대표자가 이사회를 열어 불법행위를 '결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인의 책임은 없다"고 밝혔다. 종친회의 청년이사, 총무이사 등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마당에 사용자의 책임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한 경우였다.

▲ "여자들이 그만하라면 그만하지. 말이 많어!"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입김측이 1심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현장을 담은 비디오테이프였다. '테이프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승소를 확신했던 입김측은 2심 재판부에 테이프검증신청을 했고 담당판사 4인(부장판사 조용구)과 입김측 회원들, 그리고 종친회측 대표 1인이 참석한 가운데 상영회가 열렸다.

입김측은 입회한 판사들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본 뒤 승소를 확신했다. 더욱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해 전시회를 방해했던 주모자가 바로 상영장소에 나와있었던 것. 즉석에서 판사들은 "저 사람이 당신 맞냐"고 물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종친회측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비디오 테이프에 등장하는 이들이 가슴에 전주이씨 종친회 소속임을 알리는 배지를 달고 있어 종친회의 조직적 가담을 입증하는데 중요한 증거로 작용했다.

종친회측의 '두 번의 실수'가 도와준(?) 승리

입김 회원인 류준화씨는 "어떻게 보면 종친회측의 두 번의 실수(종로경찰서에 사실조회를 신청한 것과 비디오테이프 상영 과정에서 종친회 당사자가 나와있었던 것)가 우리를 도와준 셈"이라며 재판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문광부의 지원으로 전시회를 기획한 입김은 전주이씨 종친회와의 충돌과정을 내내 지켜본 당시 문광부 담당관을 증인으로 내세우려했으나 "내가 증인으로 나가면 앞으로 나는 시댁(전주이씨)에 발도 못 붙인다"라고 고사해 끝내 증언을 받지 못했다.

또 이씨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가수 이석씨(비둘기집을 부른 것으로 유명함)는 입김측 변호사에게 두 번씩이나 압력전화를 넣었다고 한다.

입김 회원 정정엽씨는 "이번 사건은 단지 전주이씨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승소판결이 났음에도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여전히 성적 폭언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언론은 "성기묘사한 공연방해 법원 종친회는 배상하라"(조선일보 6월 5일자) "성기묘사물 전시 저지 유림에 손해배상 판결"(대한매일 6월 5일자), "성기 묘사 전시 막은 유림은 위자료 줘라"(문화일보 6월 4일자) 등으로 제목을 뽑아 여성미술가그룹=성기묘사를 부각시켜 취지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미술계라는 집안 안에서 소수로만 발언해야 하는 여성미술가들의 현실에서 두터운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해체한다는 의미에서 명화에 남성성기를 패러디했고, 또 자궁모양의 설치물을 빠져나오면서 탄생을 체험하는 놀이를 한다는 취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 판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배지.
한편 전주이씨 종친회측은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분위기다. 당시 현장엔 전주이씨 종친회뿐 아니라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 성균관 유도회 등 다수의 유림들이 있었다는 것. 따라서 전주이씨 종친회의 '조직적인' 동원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비디오 테이프의 조작 가능성도 제기했다.

입김측이 제작한 당시 현장비디오테이프는 10여분으로 편집돼 인권영화제와 여성연화제에 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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