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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육젓 드이소~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멸치육젓!
ⓒ 이종찬
"메르치(멸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싱싱한 생메르치 젓갈 담으이소~ 메르치! 메르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달달하고 구수한 생메르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한반도 남녘, 경상도 곳곳에서는 해마다 오뉴월 이른 새벽이면 생멸치 젓갈을 담으라는 아주머니들의 늘어지는 목소리가 동편제처럼 울려퍼진다. 이는 지난 3~4월이 새벽안개처럼 푸르스럼한 재첩국을 먹는 철이었다면, 오뉴월은 기장 대변항에서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생멸치 젓갈을 담는 철이라는 그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생멸치를 사라는 아주머니의 구성진 목소리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가까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싱싱한 멸치육젓이나 멸치액젓을 구할 수 있는데, 굳이 생멸치를 사서 번거롭게 젓갈을 담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오뉴월이 다가오면 이 지역 마을 아낙네들은 생멸치를 파는 아주머니가 이제나 저제나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 때를 놓치면 멸치젓갈을 제대로 담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구수하면서도 감칠맛 깊은 멸치젓갈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잘 익은 멸치육젓 한 통에 5천원
ⓒ 이종찬

▲ 기장 대변항에서 오뉴월에 건져올린 왕멸치가 특히 맛이 좋다.
ⓒ 이종찬
특히 오뉴월 장독에 담근 생멸치는 보름에서 한 달쯤 지나면 생멸치의 살이 물컹물컹해지면서 구수한 향과 함께 독특한 단맛이 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때쯤이면 밥상 위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것이 생멸치 육젓이었다. 살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생멸치 육젓 살점 한 점을 밥 위에 올려 먹으면 그 독특한 감칠맛 때문에 밥 한 그릇은 금세 뚝딱 비운다.

어디 그뿐이랴. 오뉴월에 담근 멸치젓갈은 김장철이 올 때까지 가난한 시골의 허술한 밥상을 지켜주는 든든한 밑반찬이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여러가지 나물을 무칠 때에도 반드시 멸치젓갈을 기본 양념으로 썼고, 밭에서 금방 뜯어낸 싱싱한 채소로 쌈을 싸먹을 때에도 쌈장으로 멸치젓갈과 된장 두 가지를 내놓았다.

이처럼 우리가 즐겨먹는 멸치젓갈은 영양가뿐만 아니라 약효도 뛰어나다고 한다. 지난 해 5월 부산 동의대 생명응용과학과 정영기(57) 교수는 "한국의 전통발효식품인 멸치젓에서 성인병의 원인 중 하나인 피떡을 분해시키는 물질을 발견해 이를 '멸치키나아제(Myulchikinase)'로 이름 붙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피떡(혈전)은 혈액 내의 응고된 물질로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미세혈관을 막아 심근경색, 뇌중풍(뇌졸중), 폐경색, 고혈압 등 성인병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며, 이러한 환자에게 '멸치키나아제'를 투여한 결과 피떡이 녹으면서 혈액의 흐름이 아주 좋아졌다고 밝혔다. 게다가 여러 암세포를 대상으로 멸치키나아제를 항암제와 함께 투여했을 때 항암제만 사용했을 때보다 약효가 훨씬 높게 나왔다고 한다.

▲ 불그스름한 멸치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맛깔스런 멸치육젓
ⓒ 이종찬

▲ 멸치육젓에 마늘, 매운 고추, 잔파, 고춧가루를 듬뿍 넣으면 금세 밥도둑으로 변한다
ⓒ 이종찬
멸치젓갈은 특유의 구수한 향과 함께 텁텁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혀끝을 감싸도는 감칠맛이 그만이다. 멸치의 살이 붙어있는 멸치육젓은 송송 썬 매운 고추와 빻은 마늘, 송송 썬 잔파,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잘 버무려 살점을 올려먹는 맛이 끝내준다. 멸치의 살이 다 녹아내린 멸치액젓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김장을 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양념이기도 하다.

"자기 멸치젓갈 좋아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요즈음 한창 맛이 좋을 땐데."
"오늘 멸치육젓 한 통 들고 갈 테니까 기대해."
"멸치육젓은 기장 대변항에 가서 사와야 제 맛이지."
"체! 누굴 바보로 알아.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기장 대변항에 있는 특산물 마트에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거네요."


그렇다. 경상도에서는 생멸치, 하면 기장 대변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특히 오뉴월에 건져올리는 기장 대변항의 왕멸치(10~15cm)는 가을에 건져올리는 왕멸치보다 살이 많고 연하기 때문에 그 맛이 훨씬 고소하고 달착지근하다. 특히 입맛이 없을 때 멸치육젓을 꺼내 연하게 녹아내리는 멸치 살을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밥 좀 더 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집에서 멸치젓갈을 담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다. 싱싱한 생멸치를 사서 소금물에 깨끗이 씻은 뒤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뺀다. 그 다음 생멸치를 적당한 부피로 항아리에 꼭꼭 눌러서 담고 멸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왕소금을 뿌리는 것을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항아리 맨 위에 왕소금을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뿌린 뒤 커다란 돌멩이를 얹어 꼭꼭 막은 뒤 시원한 곳에 두면 그만이다.

▲ 양념이 아주 잘 된 멸치육젓
ⓒ 이종찬

▲ 멸치젓갈은 심근경색, 뇌중풍(뇌졸중), 폐경색, 고혈압 등 성인병에 아주 좋다고 한다
ⓒ 이종찬
그렇게 한 달쯤 지나 뚜껑을 열어보면 멸치 특유의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번지면서 멸치의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 때가 멸치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멸치육젓을 꺼내 먹기에 가장 좋은 때다. 하지만 생멸치를 김장용 액젓으로 담갔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뚜껑을 열어보지 않는 것이 좋다.

나물무침용이나 김장용 멸치젓갈은 달여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익은 멸치젓갈에 물을 2:1의 비율로 붓고 센 불에서 팔팔 끓이면 멸치살은 모두 빠지고 뼈만 남게 된다. 이때 멸치액젓을 체에 밭쳐 거른 다음 찌꺼기는 버리고 다시 한번 팔팔 끓인다. 그리고 멸치액젓과 소금을 10:3의 비율로 섞어 보관하면 끝.

한가지 주의할 것은 살이 그대로 붙어 있는 멸치육젓이나 살이 모두 녹아내린 멸치액젓에 짠맛을 줄이기 위해 물을 붓거나 맛을 더 좋게 한다며 화학조미료를 섞으면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멸치젓갈에 다른 불순물을 섞으면 금방 변질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멸치젓갈은 100% 천연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서울사람들은 김장김치든 일반 김치든 김치를 담글 때 멸치젓갈을 쓰지 않고 새우젓갈을 쓴다더구먼."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멸치젓갈을 구하기가 어렵지."
"그때도 이맘때쯤이었지, 아마. 멸치젓갈이 하도 먹고 싶어서 서울 시내에 있는 재래시장을 샅샅이 훑고도 결국 못 사고 말았잖아."
"하여튼 서울 김치는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맛은 있지만 깊은 맛이 없고, 경상도 김치는 텁텁한 것 같지만 구수하고 깊은 감칠맛이 그만이야."


▲ 하얀 쌀밥 위에 멸치 살점을 올려놓고 먹는 그맛은 정말 끝내준다.
ⓒ 이종찬
아내가 때 맞춰 사 온 기장 대변항 멸치육젓. 멸치육젓의 두껑을 열자 이내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온 집안에 흐른다. 두 딸 푸름이와 빛나는 '이게 무슨 냄새야?'하며 인상을 잔뜩 쓰고 코를 틀어막는다. 하지만 그 멸치육젓에 마늘과 매운 고추, 잔파, 고춧가루를 집어넣어 버무리자 금세 빛나가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묻는다.

내가 '밥도둑'이라며 젓가락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멸치살을 한 점 떼내 입에 넣고 기분 좋게 우물거리자 둘째 딸 빛나가 '나도' 한다. 그냥 먹으면 빛나가 짜다고 할 것 같아 하얀 쌀밥 위에 잘 익은 멸치살을 얹어 입에 넣어주자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냥 꿀꺽 삼켜버린다.

"아빠! 정말 맛있어. 또 줘!"
"상추쌈에 싸먹으면 더 맛있다."
"아싸! 내가 좋아하는 파마상추다. 아빠! 상추에 밥은 내가 쌀 거니까 멸치살만 조금 떼서 올려줘."
"알았어."
"음~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인제서야 먹어? 이거 아직 많이 남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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