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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수
요즘 계속되는 경기불황과 예년보다 훨씬 추운 날씨 여파로 연탄과 내복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가스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놓고 반소매로 겨울을 나는 도시민들에게야 다소 생경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기자에게도 어린 시절 연탄에 얽힌 추억이 아련히 남아있다.

조막만한 손으로 연탄 부지깽이를 잡고 연탄불 갈겠다고 나섰다가 땅바닥에 연탄을 떨어뜨려 깨트리고 야단맞았던 것하며, 겨울이면 연일 방송과 신문보도를 통해 잠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생을 달리한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끊이질 않았다.

▲ 곱게 손 맞잡고 웃음 지으시는 주인 아주머니. 주방으로 손님 상으로 왔다갔다 항상 바쁘시다.
ⓒ 유영수
또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해 온 가족이 방에 연탄불을 피우고 자살을 기도하는 일도 왕왕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탄가스를 마신 사람에게 해독에 좋다는 황태국물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참고로 황태는 노폐물 제거와 간장 해독, 숙취 해소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황태는 그리 흔하게 접해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기자도 강원도를 여행할 때 꼭 들러야 할 코스라며 리포터들이 열심히 안내해 주는 것을 방송에서 몇 번 봤을 뿐, 실제로 황태를 만난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명태 알은 각각 창란젓과 명란젓을 만드는 데 쓰이기 위해 젓갈 공장으로 보내어지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명태는 매년 겨울 가장 매서운 날씨에 코를 꿰인 채 덕장에 매달아진다고 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황태는 꽁꽁 얼게 되고, 한낮 따사로운 햇살에 다시 황태는 언 몸을 녹인다.

이렇게 얼었다 녹는 일을 20여 회 3개월 동안 반복해서야 명태는 황태로 거듭나는 것이다. 결국 황태는 찬 바람과 겨울햇살에 눈까지 합세해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명태를 겨울바람과 햇살에 말린다고 해서 다 황태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너무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 껍질이 하얗게 변한 '백태'로, 요즘처럼 겨울답지 않은 날이 이어질라치면 '강태'가 되어 황태로서 제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세찬 바람에 심하게 시달리면 황태살의 질감이 부드럽지 않으며, 반대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래서 혹자는 황태의 맛을 '하늘에서 내린 맛'에 비유하기도 하고, 황태덕장을 운영하는 이를 가리켜 '하느님과 동업하는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 마당 한 켠에 황태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손님을 맞이한다.
ⓒ 유영수
▲ 식당 마루 선반에 얹어져 있는 황태 두름
ⓒ 유영수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음식을 도심 한복판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정녕 축복받은 일이라 하겠다. 기자가 이 음식점에서 황태찜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라 하면 과장된 것일까.

영등포구청 인근에서 볼일을 보다 점심시간이 되어 차를 타고 먹자골목을 빙빙 돌고 있는데, 일방통행길인 한 골목을 지나다 더 안쪽에 나있는 작은 골목 끄트머리 벽에 걸린 정말 조그마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치 첫사랑을 하게 될 여인을 많은 인파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처럼 말이다.

▲ 이렇게 작은 안내판을 보고 이곳을 찾았으니 먹을 때만 기자의 시력은 급격히 좋아지는가 보다.
ⓒ 유영수
노래방을 홍보하는 페인트 글씨 옆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대문집 土房(토방)'이란 상호와 함께 황태찜 백반이 메뉴로 적혀 있었다. 그 작은 글씨가 어찌 기자의 눈에 들어왔을까. 맛있는 음식점 찾아내는 솜씨를 가리는 대회가 있다면 꼭 참가해야 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골목 한 귀퉁이에 주차를 하고 현수막이 걸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대문이 보이고 그 안에 작은 식당이 있다. 현수막이 아니라면 이 식당이 있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구조로 돼있는 것이다. 일단 내부에 들어서면 고풍스런 멋이 일순 풍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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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한옥집을 약간 손봐 음식점을 꾸려나가는 듯 보였는데, 예전엔 한지로 덮여져 있었을 법한 나무창틀이며, 앉아 있으면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것까지, 어릴 적 살던 옛날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황태찜과 황태국 중 어느 것을 먹어볼까 잠시 고민하다 과감히 황태찜을 주문한다. '과연 어떤 맛일까' 기대하며 음식점 내부를 둘러보니 작은 방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흡사 휴가철 여행지에서 대면할 수 있는 방갈로가 연상된다.

이내 상 위에 반찬들이 차려지고 오늘의 메인요리인 '황태찜'이 상 한가운데에 주저없이 자리를 잡는다. 돌판 위에 맛있게 누워있는 황태는, 매콤한 양념으로 재어놓은 것을 후라이판에 자글자글 끓인 후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채로 상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 양념에 재어놓은 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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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이팬 안에 양념된 황태와 두부를 넣고 끓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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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에 한 토막씩 주어지는 황태찜 백반에는 황태국이 딸려 나온다. 어떤 것을 먹어야 하나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두 가지를 다 맛볼 수 있는 셈이다. 허나 반찬으로 곁들여 나온 황태국에는 국물이 주일 뿐 황태살은 찾아보기 힘들다.

황태는 부드럽게 목넘김 할 수 있도록 잘 쪄져 있었으며 황태속살까지 깊숙이 배어있는 양념은 감칠맛을 낸다. 처음 먹는 사람은 단번에 반할 만 하다. 여기서 처음 황태음식을 접한 이후론 유난히 황태를 재료로 음식점을 하는 곳이 눈에 많이 띈다. 역시 관심이 있어야 눈에도 보이는가 보다.

▲ 두 사람이 마주쳐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주방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진다.
ⓒ 유영수
다른 반찬들도 맛깔스런 편이어서 매번 갈 때마다 식사는 무척 만족스럽다. 다만 옛날 집 구조라 웃풍이 너무 센 데다 난방도 잘 되는 편은 아니어서 춥게 느껴지는 것과, 공기에 담은 밥의 양이 조금 적다는 것은 흠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제법 훌륭한 음식맛에 비해 점심시간에도 심하게 붐비지는 않아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집만의 또 다른 매력으로 여겨진다.

덧붙이는 글 | 맛있는 음식과 멋스런 풍경사진을 테마로 하는 제 홈피 '멀리서 바라보다 뜨겁게 사랑하기'
(http://blog.naver.com/grajiyou)에도 올려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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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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